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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상을 둘러싼 대승철학파들의 논쟁 ‘공’은 극단적 허무론인가? 또는 존재적 본질을 깨닫기 위한 실천적 분석법인가? 
해심밀경 불교 유식사상의 근본 경전. 5권.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해심밀경(解深密經)>은 산스크리트어 원본은 없으며, 한역(漢譯)으로 <심밀해탈경(深密解脫經)>과 <해심밀경> 2가지가 있다. 이 경은 기원후 300년 전후에 성립되었다고 보며, 중기 대승경전에 속하고, 문답 형식으로 논술되어 있어서 경(經)이라기보다는 논(論)의 부류에 속한다. 여기에 담긴 이론은, 원시불교의 무아(無我), 초기 대승불교의 공(空)과 같은 불교의 기본적인 원리 속에 들어 있으며 각양각색으로 변화하는 현실의 경험세계에 있어서의 주체에 관해서 이를 심리적으로 고찰하는 단서(端緖)가 된다.

중관학파와 유식학파
중관학파(中觀學派, madhyamika)는 용수(龍樹: 150~250)의 불교사상을 바탕으로 체계화된 종파이다. 중관파는 유식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이대 조류를 이루었다. 용수의 사상은 그의 제자인 제바(提婆, Āryadeva. 170~270)와 또 제바의 제자인 라후라발타라(羅喉羅跋陀羅, Rāhulabhadra, 3세기)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 학파의 주요경전은 용수가 쓴 <중론(中論)>, <십이문론(十二門論)>과 그의 제자 아리아데바(Āryadeva, 提婆)가 쓴 <백론( 百論)>이다. 5세기에 구마라집은 중관학파의 기본 문헌을 한문으로 번역했고, 그 가르침은 6~7세기 길장에 의해 삼론종으로 더 체계화되었다. 이 삼론의 교의는 한국에 전래되었으며, 한국의 승려 혜관이 625년에 처음으로 일본에 전했다.
유가행파는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과 그 밖의 논서를 저술한 미륵(彌勒)을 종파의 조사로 한다. <유가사지론>은 불교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대승불교가 완성되고 있던 시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이 논서는 유식유가행파의 중도설과 연기론(아뢰야연기설) 및 3승교(三乘敎)의 교의의 근거가 된다. 유가행파는 호흡을 조정하고 마음을 가다듬는 등의 지관(止觀) 수행을 통해 유가행(Yoga)을 실천하였는데,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아뢰야식이라는 새로운 심식(心識)과 이에 따른 체계를 도입함으로써 중관학파의 공사상에서 불충분한 점을 보충하고, 일체의 존재는 심식의 변전이며 심식만이 실재라고 보는 유식설(唯識說)을 세워 대승의 교리적인 발전을 성취하였다. 
유가행파의 근본 경전은 <해심밀경(解深密經)>이다. 유가행파는 후일 디그나가(Dignāga, 陳那)의 유상유식파(有相唯識派)와 구나마티(Gunamati, 德慧)의 무상유식파(無相唯識派)의 두 파로 나뉘며 바수반두 이후 인도 사상계에서 크게 우세하게 되어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공 사상에 대한 논쟁
‘공’은 ‘연기(緣起)’에 그 연원을 두고 있다. 현상계를 유전하는 모든 존재는 인연(因緣)의 화합으로 생멸하는 존재이므로 고정 불변하는 자성(自性)이 없다는 뜻이다. 이처럼 만물은 단지 원인과 결과로 얽혀 상호의존적 관계에 있기 때문에 무아(無我)이며, 무아이기 때문에 공(空)이라고 한다. 이때의 공은 고락(苦樂)과 유무(有無)의 양극단을 떠난 중도(中道)이며, 이것이 부처님이 깨달은 핵심 내용이다.
그런데 부파불교에서 법체(法體)는 항상한다는 실재론(實在論)을 주창하였기 때문에 초기 대승불교에서는 법의 항유(恒有)를 부정하면서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의 이공설(二空說)을 내세운다. 아공은 자아를 실재라고 인정하는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고, 법공은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요소에 대하여 항상한다는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공사상을 철학적으로 체계화한 사람은 용수(龍樹, Nāgārjuna)보살이다. 용수는 <중론>을 통해 <반야부 경전>의 공사상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써 이를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다. 이로 인해 인도에서는 중관학파가 일어났으며, 유가행파와 더불어 인도 대승불교의 2대 사조를 형성하였다.
유가행파도 <중론>의 공사상을 계승하여 현실세계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려는 삼계유식설(三界唯識說)과 삼무성설(三無性說)을 내세웠다. 또한 중관학파와 유가행파의 사상이 혼합된 형태로 티베트에는 총카파(1357∼1419) 교학의 기반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의 원효는 <기신론소>에서, 이 공사상에 입각하여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두 학파의 대립
<반야경>에서는 공사상을 통해서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했다. 이를 계승한 용수도 역시 부파불교의 법유설(法有設)을 비판했다. 용수의 공사상을 구성하는 핵심 개념은 연기·무자성·공·가명·중도인데, 그 모두는 부파불교의 법유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반대로 유식학파는 중관학파를 허무주의라고 비판한다. 중관학파도 유식학파아말로 허무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는 중관과 유식의 양 학파가 공사상을 최고 진리로 인정하면서도, 공사상을 서로 다른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먼저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일체의 사물이 공이며, 고정 불변의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용수는 삼세의 일체법이 모두 연에 의해서 발생하고 존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자성·공·가명·중도라고 주장하며 법유설을 비판한다. 용수는 그래서 <중론>과 <회쟁론>에서 “연기는 공성이다. 그것은 연(緣)에 의존해서 시설된 가명(假名)이며, 실로 그것이 중도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그것을 공성이라고 말한다. 또 여러 사물에 연해서 존재하는 것, 실로 그것이 무자성인 것이다. 연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없다. 그러므로 실로 공이 아닌 법은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용수는 그래서 일체의 사물이 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일체의 사물이 다른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성이란 ‘만들어지지 않은 것’,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기를 인정하는 한 자성은 인정될 수 없으며, 그런 점에서 일체법은 무자성이라고 보는 것이다. 
더불어 연에 의해서 발생한 사물이 가명이라는 것은 마치 일체법이 여러 연에 의해서 발생한 명칭일뿐으로 자성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지 않기 때문에 고정 불변의 존재도 비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비유비무(非有非無)의 중도라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 연기 관계이므로 자성이 없고 그래서 일체의 사물은 임시로 시설된 명칭에 불과하다(假名). 그러므로 사물이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은 단지 명칭일 따름이다. 이처럼 일체의 사물은 다만 명칭으로서 발생하고 소멸하는 것이므로, 고정 불변의 존재성도 고정 불변의 비존재성도 갖지 못해 중도(中道)라고 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식학파는 연기와 무자성은 같이 보지만 일체법이 공이고 가명이라는 것은 부정한다. 즉 유식학파는 허망분별(=식)과 공성은 불공(不空)이며, 따라서 일체법이 모두 공인 것은 아니라고 한다.  
즉 허망분별은 있지만, 거기서 두 가지는 존재하지 않는데, 실로 여기에 공성이 있고, 그 속에 또 그것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허망분별이란 아뢰야식을 뜻한다. 즉 허망분별이 분별해낸 결과인 대상, 중생, 자아, 의식의 네 가지중 앞의 둘은 인식 대상이며, 뒤의 둘은 인식 주관이다. 자아란 육식 밖의 제7말나식을 의미하며, 의식이란 제6의식을 의미한다. 즉 인식 대상(=所取)과 인식 주관(=能取)이 모두 허망분별의 소산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아뢰야식은 있고, 인식 주관과 인식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들의 인식은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의 대립에 의해서 성립한다. 그 인식 대상과 인식 주체는 2취(소취와 능취)이다. 유식유가행파에 따르면, 2취(二取)는 능취(能取)와 소취(所取)로, 2취가 모두 소멸된 것을 2취멸(二取滅)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2취가 생겨나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곧 택멸(擇滅), 즉 열반이다. 능취(能取)는 모든 색근(色根)과 심(心) · 심소(心所)를 말한다. 즉, 5색근과 마음(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통칭한다. 소취(所取)는 능취에 의해 취해지는 법을 말하는 것으로 곧 일체(一切)를 말한다. 즉, 일체법을 달리 말하여 소취라고 하며, 인식대상이라고도 한다.
2취는 허망분별에 의해서 분별된 결과물이다. 유식학파에 따르면 이 능취와 소취는 모두 실재가 아니고, 이렇게 능취와 소취가 비실재임을 알게 됨으로써 허망분별의 결과인 능취와 소취는 더 이상 지각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때에도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즉 소취와 능취의 원인이었던 허망분별은 그때에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허망분별과 함께 거기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공성)이다. 따라서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곧 상호 구분되지 않는 허망분별과 공성이다. 그 두 가지는 능취와 소취가 사라진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실재이다. 유식학파는 이런 사고에 근거해서 일체법이 무자성임을 인정하면서도 허망분별과 공성을 실재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중변분별론>에서는 또 “실로 (소취와 능취라는) 두 가지의 비존재와 그 비존재의 존재(無의 有)가 공의 특징이다. (그것은) 존재도 아니고, 또 비존재도 아니다. 또 (그것은 허망분별과) 다른 특징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고 했다. 
이렇듯 유식학파는 소취와 능취의 비존재성(=空性)을 실재로 간주한다. 즉 ‘비존재의 존재’이다. 이처럼 <중변분별론>에서 중도는 소취와 능취의 ‘공(=非有)’, 그리고 허망분별과 공성의 ‘불공(=非無)’으로 주장한다. 따라서 유식학파는 일체법을 공도 아니고 불공도 아니라고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중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라고 주장하게 된다. 
중관학파의 공사상에 대해 유식학파는 중관학파가 ‘일체가 명칭만 있고 실재가 없다’고 하면 극단적인 허무론이고, 자신을 파괴하며, 세상 사람들도 파괴한다고 비판한다. 
유식학파는 중관학파의 주장처럼 ‘가명의 근거가 실재하지 않는다면 가명은 결코 시설될 수 없으므로, 일체가 다만 가명일 뿐이라는 주장은 불합리’하다고 하며, 중관학파의 공사상은 진실과 가명이라는 두 가지를 모두 훼손하기 때문에 극단적인 허무론이라는 것이다. <유가사지론>에서는 “공은 실재이기 때문에 공성이 있는 것이다. 또한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 있겠는가? 또한 이로 말미암아 실로 그들의 공성은 입증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악취공이라고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선취공은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 그것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바르게 관찰하면서,  또 여기에 남아 있는 것, 그것이 여기에 진실로 있다고 여실하게 알아 공성을 깨닫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선취공이란, ‘남아 있는 것의 실재’이다. 그래서 유식학파는 중관학파가 주장하는 ‘일체가 비존재’라면 어디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공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중관학파는 공이 유식학파가 말하는 것처럼 비실재나 비존재를 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중관학파는 무자성인 사물의 실상을 드러내어 중생들이 사물에 대한 집착을 떨치도록하는 목적을 지닌 실천적 의미의 개념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유식학파의 비판은 오해라는 것이다. 
오늘날 논리학적으로 보면, 중관학파의 공사상이, 일체가 실체가 없는 명칭일 뿐이라면 과연 그 명칭은 실재하는 사물이 없이도 붙여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있고, 유식학파의 공사상은 능취와 소취의 비존재성인 공성을 실재라고 인정하는 것이 과연 논리적인지가 의문이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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