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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산사에 있는 유물들 (9) 대흥사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95)
1764년 색민이 25명의 화승들과 함께 그린 높이 10미터의 <대흥사 괘불>

대흥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 외에 보물로 지정된 여러 점의 유물이 전한다. 이들 보물 중에 불화는 1764년에 만들어진 대흥사 괘불이 유일하다. 보물로 지정된 불화가 적은 이유는 아마 1899년 대화재로 북원에 있는 많은 전각이 불타버려 시대가 올라가는 그림이 적게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대흥사 괘불은 1764년 색민(色旻)을 수화사로 하여 재일(再日), 도선(道善), 유심(有心) 등 모두  26명이 함께 제작한 불화이다. 그림 크기는 화면만 세로 9.6m, 가로 7.5m이고, 배접한 부분까지 합하면 높이가 10m가 넘는 거대한 그림이다. 괘불이 초파일 등 야외 법회를 할 때 밖에 거는 그림이다 보니 이렇게 크게 그린 것이다. 안료도 비쌌지만 그림의 바탕이 되는 천을 마련하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지방이어서 그런지 비단이 아닌 마에다 그림을 그렸다. 초벌 그림, 오늘날 스케치하는 것도 쉽지 않지만 각 부분을 세심하게 색칠하려면 여러 명의 화승들이 일을 분담해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선시대 후기에는 지방마다 뛰어난 화승 아래 여러 명의 화승들이 모여 절에서 청하면 들어가서 몇 개월 동안 여러 폭의 불화를 그리곤 했다. 
대흥사 괘불을 그린 색민은 18세기 중반 전라도를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지리산을 중심으로 전라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화승 집단을 이끌고 많은 불화를 그린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승 의겸(義謙) 밑에서 그림을 그렸다. 의겸과 함께 제작한 불화로 나주 다보사 괘불, 부안 개암사 괘불, 화엄사 삼신불도 등이 있고, 1749년에 그린 구례 천은사 칠성도에서는 의겸 다음에 자신의 이름이 올렸다. 이때 그만큼 실력을 인정받았다는 얘기다. 이런 사실로 보아 색민은 의겸 화맥을 이은 화승이라 할 수 있다. 색민은 이 대흥사 괘불을 그린 1764년 불사에서부터는 독립하여 자신이 수화승이 되어 활동했다. 즉 이 시기에 그의 기량이 원숙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대원사 아미타불도 등 여러 그림과 불회사 신중도, 영국사 삼장보살도 등을 그렸고, 1775년 백양사 극락보전 아미타불도가 현재 전하는 늦은 시기의 그림이다. 
색민이 제작한 불화는 턱, 눈썹, 어깨를 둥글게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스승인 의겸이 그린 불화의 부처님이나 보살의 상호보다 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색상도 다홍색과 연녹색을 중심으로 청색과 흰색을 적절하게 사용하여 더 밝고 화사하다. 
대흥사 괘불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영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靈山會)로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키 모양의 두광을 하고 긴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올려 손바닥을 위로 하고 엄지와 중지를 마주대고 있다. 손가락은 괜찮지만 현대 그림과 비교할 때 팔 표현은 어색하다. 사실 김홍도 같은 대가와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서양화가들이 그린 손과 팔을 비교하면 차이가 많이 난다. 전반적으로 우리나라 옛날 화가들이 유독 손과 팔은 잘못 그린다. 왜 그럴까? 팔의 길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 섰을 때 팔이 무릎까지 닿는 것은 부처님의 상을 표현한 삼십이상 팔십종호에 그렇게 나왔기 때문에 규범에 맞게 그린 것이다. 사실 그렇게 길어야 반가사유상에서 상체를 세운 채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오른쪽 검지가 볼에 닿을 수 있다. 팔이 길지 않으면 허리와 고개를 숙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반가사유상이 고개는 살짝 숙였지만 허리까지 숙이지 않은 것은 바로 팔의 길이가 보통사람들과 달리 길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괘불의 왼손은 손목과 팔목이 경계가 없이 통나무처럼 표현되었다. 도대체 왜 이렇게 팔을 잘 표현하지 못할까? 
 여기서 이 그림을 120-30년쯤 전 프랑스에서 그려진 그림과 비교해보자.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박물관에는 니콜라 푸생이라는 프랑스 화가가 그린 <나도 아르카디아에 살았었다>는 그림이 있다. 양치기들로 보이는 청년들이 돌로 만들어진 고대의 무덤에 새겨진 글을 해독하고 있다. 글을 읽는 너희들처럼 나도 한 때는 이곳에 살았었다는 라틴어로 쓰인 묘비명의 뜻을 해독한 청년들이 한편으로 놀라며 다른 한편으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순간을 포착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양치기들의 팔과 다리를 보면 전체적인 비례와 근육의 모습 등 매우 사실적이다. 이에 비해 괘불에 그려진 부처님의 팔은 전혀 사실적이지 못하다. 왜 이런 차이가 나타났을까?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있는 1639년 니콜라 푸생이 그린 그림<나도 아르카디아에 살았었다>


서양의 화가들은 인체의 완전한 비례와 사실적인 표현을 위해 엄청난 연습을 한다. 근육을 표현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시신을 해부하며 직접 해부학을 공부했다니까 당연히 신체 각 부분까지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손과 팔은 옷 속에 숨겨져 있었고, 손을 제외하고 남에게 맨살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 당연히 굳이 그릴 필요도 없었고, 생생하게 그리는 연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나라 옛 그림 중에 팔과 손이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은 드물다. 특히 불화인 경우는 부처님의 상호, 즉 얼굴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에 얼굴을 섬세하게 표현하되, 신체의 다른 부분 표현은 삼십이상 팔십종호에 따라서 그렸다. 
삼십이상에서 말하는 부처님의 팔과 다리 모습을 예로 들면, 발바닥은 평평하여 지면에 골고루 닿고, 발꿈치는 풍만하고, 발등은 높고 두터우며, 손가락이 길고, 팔은 무릎에 이를 만큼 길고, 손가락과 발가락에 물갈퀴 같은 막이 있으며, 손발이 모두 유연하다는 것이다. 다소 이상하게 보이는 것도 있지만 보통사람과는 다른 분이셨으니 이해할 수 있다. 물갈퀴가 있었으니 요즘에 사셨으면 올림픽에 나가시면 금메달은 아주 쉽게 따셨을 것이다. 불화에서는 이러한 삼십이상과 팔십종호를 따라 부처님을 그렸고, 증명하는 스님들은 이것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확인하였다.
대흥사 괘불은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보살을 양옆에 배치한 단순한 구도이다. 부처님은 둥글지만 당당한 어깨, 큼직한 육계(정수리) 등 장대한 모습을 보여주고, 왼쪽의 문수보살과 오른쪽의 보현보살은 각각 여의와 연꽃을 들고 있는데, 두 분 다 화려한 보관을 쓰고 다양한 무늬가 장식된 천의를 걸치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 머리 양쪽에는 작은 아미타불과 관음보살이 그려졌는데, 색민이 1749년 스승인 의겸과 함께 개암사에서 그렸던 괘불과 거의 비슷하다. 18세기 중반 전라도 지역에 의겸의 영향력과 당시 유행했던 괘불 형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불화이다. 혹 초파일에 대흥사에 들리면 반드시 괘불을 보고 부처님께 예불도 하고 부처님과 보살의 모습도 살펴보자.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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