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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불교종합대학이자 남방불교의 전법 진앙지 산치승원 ①이정하(여행작가)
네 개의 문을 가진 산치 대탑(1번 탑)은 직경 36.6미터, 옥개, 보개라고 불리는 상륜부를 포함하는 높이 13.46미터의 크기를 가지고 있다. 탑신의 중간에 높게 위치한 원형의 테라스는 남쪽에서 두 부분으로 된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 1층 기단부에는 돌로 포장된 경행로가 있는데 아름답게 조각된 4개의 입구를 통해 들어갈 수 있다. 처음 산치대탑이 조성될 때는 마우리아왕조의 영향으로 구운 벽돌과 회반죽으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 사암을 덧붙여서 마감을 했고 상륜부, 네 개의 문, 난간, 바닥 등도 사암으로 만든 것이 지금의 모습이다. 탑의 상단의 사각의 테라스로 이루어져 있고 그 가운데 우산모양의 상륜부가 있다.테라스의 난간은 사각으로 되어있고 가로의 돌은 타원형으로 되었으며 가장 바깥 난간의 기둥은 팔각으로 되어있고 기둥과 기둥을 잇는 가로의 돌은 타원형으로 이루어졌다. 일부 가둥과 바닥 석재에는 한 때 이 지역을 통치했던 사타와하나왕조의 불교 후원자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산치대탑에 가장 늦게 더해진 것은 네 개의 문에 놓인 불상이다. 굽타시대에 조성된 선정인의 불상이 있는데 정교한 광배가 있다. 비록 많이 부서지기는 했지만 균형 잡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부처님이 쿠시나가르에서 80세에 열반에 든 후 가까운 강가강에서 화장을 했다. 이때 작은 물체들이 많이 나오자 제자들은 이를 사리라(Sarira=신골(身骨)·영골(靈骨)·정골(淨骨)·유신(遺身)라고 불렀다. 이 사리는 모두 8말 4되였다고 하며 당시 인도의 8개 나라에 탑을 세워 안치했다. 

산치2호탑


이를 다시 아소카 대왕 재세시 8만4천개의 탑을 인도 전역에 세우고 불사리를 나누어 안치하니 사람들은 부처님의 화신이 있는 탑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게 된다. 산치에도 이때 세운 탑이 7기이나 지금은 3기만 남아 있다. 여기서 나온 불사리는 영국이 탑을 해체해 가져갔으나 나중에 돌려주어 지금은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굽타시대에 조성된 불상. 광배는 간다라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산치는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12세기까지 불교의 종합대학이 운영되며 남방불교의 진앙지로서 그 역할을 다하게 된다. 이 지역에서 사용하던 팔리어는 후에 초기불교 니까야 결집의 근거가 되며,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남인도에서 발흥한 대승불교는 다시 간다라 지역을 넘어 중앙아시아에서 그 사유를 풍부하게 하며 수행집단에서 점차 종교적 교단으로 발전해 가게 된다. 
산치에 불교 대탑과 거대한 승원이 자리잡게 된 이유는 아소카와 데바의 사랑이야기가 근거가 되었다고 한다. 많은 부분은 후대에 각색이 되어 진실은 역사 너머에 있게 되었지만, 아소카가 남방에 전법사를 보내는 중심지로서는 산치승원에 대하여는 스리랑카와 티베트의 여러 역사서에 이야기가 일치하는 부분이 많은 편이다. 

대탑 탑돌이 회랑. 탑돌이 신앙은 부처님의 사리탑을 중심으로 산치에서 발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산치의 고대 지명은 까까라야(또는 까까나와)였다. 아소카대왕이 이곳에 불교사원과 대탑을 세운 연원은 이렇다. 
이곳에는 원래 아소카 대왕 시기 이전부터 ‘제띠야기리’라는 승원이 있었다고 한다. 이 승원이 불교사원인지는 어디에도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소카가 사랑에 빠진 데비라는 여인이 불교도였다는 데서 이 승원이 불교사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스리랑카의 불교역사서인 마하왐사에 따르면 아소카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아완디(또는 아반티) 왕국의 수도였던 웃제니라는 중인도 지방의 태수로 부임했다. 웃제니는 산치 옆 도시다. 웃제니에는 지방수령의 관저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상인의 딸이자 독실한 불자였던 운명의 여인, 데비와 만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부처님을 형상화한 보리수를 참배하는 제자들


아소카에게 데비는 세 번째 부인이었으나 이내 가장 사랑하는 아내가 되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아들 마힌다(기원전 281~201)와 딸 상가밋따가 태어났다. 또한 아소카는 데비를 통해 불교를 처음으로 접하기도 했다. 아들은 마힌다였고 딸은 상가밋따였다. 마힌다와 상가밋따는 불교역사상 남방불교가 존재하는데 중요한 인물이다. 두 사람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마힌다는 전법사가 되어 스리랑카로 가는 도중에 어머니 데비를 만나기 위해 산치에 머문 적이 있었다. 독실한 불교도였던 데비는  산치에서 출가승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산치대탑 남문


기원전 272년에 아소카가 마우리아제국의 왕위에 올랐다. 이후 아소카 왕은 인도 전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남부 칼링가 왕국을 정복하게 되었다. 이때 그가 이끌고 간 군사력은 60만 명에 이르는 보병, 10만 명의 기병, 9,000여 마리의 코끼리 부대였으니 실로 대단하였다. 두 나라 사이의 전투는 피비린내 나게 전개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십만의 인명 피해 끝에 아소카 왕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리스 양식의 석상

그러나 이러한 과정을 거쳐 통일 왕국을 이룬 아소카 왕은 전쟁의 잔혹함을 깨닫고 그때부터 부처의 가르침에 귀의하게 된다. 이러한 결과 그는 전륜성왕, 즉 세계의 통치자란 명칭을 얻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산치대탑 서문


또 언젠가 한 탁발승이 궁에 들어오자 살인이 일상사이던 궁인들이 그를 잡아 화형에 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타지 않았고 한 송이 연꽃 위에 앉아 있었다.

사자상

이에 놀란 궁인들이 왕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달려와 이 모습을 지켜본 아소카 왕 앞에서 탁발승은 연꽃 위로 솟아올라 자비를 설교하고 “자비를 베풀어 백성을 안심케 하소서. 그리고 온 나라 안에 부처님을 위한 탑을 세우시오.” 라고 하였다.

보리수 문양은 불상이 조성되기 이전 시대에 부처님을 표현한 것이다.

이 모습에 감명을 받은 아소카 왕은 그때부터 독실한 불교도가 되어 전국에 불탑을 세우고 불교 전파에 앞장섰음은 물론 살생을 금하였다고 한다. [계속]

아름다운 조각의 외곽 석주
석주에 조각된 정교한 불교미술의 아름다움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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