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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원측의 해심밀경소 - 삼승과 성불

<해심밀경소(解深密經疏)>는 신라의 원측(圓測, 613~696)이 지은 유식학의 중요 저술이다.
원측은 왕족으로 태어나 3세의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10대의 나이에 중국에 유학하였다. 15세 때에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에게 섭론을 들으며 교학수련에 열중하였다. 원측은 당 태종이 득도를 허락하고 장안의 원법사에 머물게 할 만큼 당에서도 일정한 후원을 받아 활동하였다. 원측은 중국에서 수학하면서 다양한 불교학을 익혀 비담·성실·구사·비바사 등에 두루 통달하고 범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하였다. 645년에 현장이 새로운 경론을 가지고 인도에서 귀국하여 <유가론>과 <성유식론> 등을 번역 소개하자 원측은 이들 사상을 수용하였다. 658년에 서명사(西明寺)가 낙성되자 원측은 대덕으로 초빙되어 이곳에서 머물며 <성유식론소>를 비롯한 많은 논서를 지어 현장의 신역불교를 널리 펴는 데 이바지하였다. 한때 종남산 운제사에 물러나와 지내고 이후 더욱 한적한 곳에서 8년 동안 한거하기도 하였으나, 다시 서명사에 돌아와 <성유식론>을 강의하였다. 그리고 <밀엄경>·<현식론> 등을 번역하는데 증의(證義)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신라에서는 신문왕이 여러 차례 원측의귀국을 요청하였으나 측천무후는 이를 허락하지 않아 원측은 끝내 신라에 돌아오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낙양에서 실차난타가 새로이 들여온 <화엄경>(80화엄) 번역에 참여한 원측은 이를 모두 마치기 전에 불수기사에서 84세로(696년) 입적하였다.
이 글은 원측 유식사상의 면모를 보여주는 <해심밀경소>중에서 <의문정석(依文正釋)> 중 일부로, 원측의 유식사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소개한다. <편집자 주>

 

원측(圓測, 613~696)

[경]  또한 승의생(勝義生)아, 모든 성문승 종성인 유정도 또한 이러한 도와 이러한 행적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위없는 편안한 열반을 증득한다. 모든 독각승 종성인 유정과 모든 여래승 종성인 유정도 또한 이러한 행적으로 인하여 위없는 편안한 열반을 증득한다.

[소]  풀이한다. 아래는 네 번째 삼무성(三無性)으로 일승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이중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성도(聖道)에 의해 일승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둘째는 ‘선남자여’ 이하로 취적성문(趣寂聲聞)이 결정코 성불하지 못함을 밝힌 것이다. 셋째는 ‘만일 회향한다면’ 이하로 회향성문(迴向聲聞)이 결정코 성불함을 밝힌 것이다. 총괄적으로 뜻을 풀이하여 말하면, 첫째 단락에서는 세 가지 종성으로 여래께서 방편으로 일승을 위하여 설하시는데 진실된 바른 이치에 의거하면 모든 삼승이 각각 구경의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한다는 것이다. <승만경>의 뜻도 이러한 말과 같다. 둘째 단락의 뜻은 정성이승(定性二乘)은 오직 이승의 무여열반을 증득하여 반드시 후에 성불한다는 뜻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유가사지론>에서 “이승이 증득한 무여열반은 단지 진여의 청정한 법계만이 있다.”라고 하였다. 셋째 단락의 뜻은 정해지지 않은 종성[不定種姓]으로서 회향한 성문은 반드시 성불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법화경>「방편품」에서는 이승의 종성을 위하여 이치가 진실하여 결정코 불과(佛果)를 이룬다는 것을 설하였다. 만일 이 말에 의거한다면 방편으로 삼승을 설하였으나 실제로는 일승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에서 “시방의 부처님의 나라 안에는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 이승법도 삼승법도 없으니,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은 제외한다.”라고 하였다.
<법화경>과 <승만경>은 각각 한 가지 뜻에만 근거한 것이다. 이제 이 한 부에 의미가 갖추어져 있으므로 <해심밀경>이 가장 완전한 뜻이다.
첫째 단락에서 다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삼승이 각각 자승(自乘)의 무여열반을 증득함을 밝힌 것이다. 둘째는 성도 방편으로 일승을 말한 것이다. 다음은 이치가 진실한 삼승의 차별을 밝힌 것이다.
이것은 첫째이니 삼승의 종성이 각각 무성의 미묘하고 청정한 도(道)로써 무여의열반(無餘依涅般)의 세계를 증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그 성도는 뜻에 통하기 때문에 도(道)라고 이름하니, 곧 그 성도는 모든 성인이 노닐었던 땅이기에 또 행적(行迹)이라고 한다. 이러한 도(道)와 행적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와 유루의 괴로운 몸을 떠나 항상 적멸에 머무는 즐거움을 증득한다. 이 때문에 편안한 열반이라고 말한다

[경]  모든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모두 이 하나의 미묘하고 청정한 도(道)를 함께 한다. 모두 이 궁극의 청정함을 함께 하며, 다시 제이승은 없다. 이것에 의지하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뜻은 오직 일승만이 있다고 말한다.

[소]  풀이한다. 이것은 두 번째 방편으로 일승을 말한 것이다. 성문이란 모든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음성을 가장 으뜸으로 삼기 때문에 스승과 벗을 따라 이 가르침의 음성을 듣고 계속하여 수행하고 증득하여,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소행(小行)·소과(小果)의 사람이기 때문에 성문이라고 한다. 독각이란 항상 고요한 곳을 좋아하여 섞여 머무르고자 하지 않으며, 수행하기를 원만히 하고, 스승이나 벗이 없이 자연스럽게 홀로 깨달아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중행(中行)·중과(中果)의 사람이기 때문에 독각이라고 이름 한다. 혹은 인연을 기다리는 것을 관(觀)하여 성스러운 과(果)를 깨닫기에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보살이란 큰 깨달음을 바라고 구하며 유정들을 가엾게 여기고 혹은 보리를 구하면서 뜻이 견고하고 용맹하며 오랫동안 수행하고 증득하여 영원히 세간을 벗어나는 대행(大行)·대과(大果)의 사람이기 때문에 보살이라고 한다. 자세한 것은 <유가석론>에서 상세히 해석한 것과 같다.
뜻을 총괄적으로 말한다. 저 삼승이 모두 이 하나의 미묘한 무성(無性)의 도(道)를 함께 하니, 이 도를 설하여 구경의 청정이라고 이름한다. 오직 이 도(道)만이 있고 다시 둘째가 없기 때문에 하나의 도라는 점에서 일승이라고 한다. 때문에 <심밀해탈경>에서 “오직 하나의 청정한 도가 있고 다시 둘째가 없으니 따로 구경청정(究竟淸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라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청정하다는 것은 미묘하고 청정한 도(道)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말한다. 하나를 말하는 것은 스스로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도(道)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한다. 둘째는 과(果)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한다. 셋째는 이치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라고 한다.
지금 이 글에 의거하면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미묘하고 청정한 도는 곧 하나의 도이고, 구경청정은 하나의 과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하나에 의한다면 다시 둘째가 없다. 그래서 <심밀해탈경>의 뜻은 오직 일승만이 있다고 하였는데, 아래의 제4권 중에서 이치에 의하면 별도의 것이 없기 때문에 일승을 말한 것이다라고 한 것과는 같지 않다. 그런데 일승이란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이다. 때문에 <승만경>에서 말하기를 “성문과 연각은 모두 대승에 들어간다. 대승은 불승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시방의 부처님의 나라 중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고 이승도 삼승도 없다.”라고 하였다. 혹은 법신(法身)으로써 일승을 밝힐 수 있다. 그래서 <법화경론>에서 “여래의 법신과 성문의 법신은 법신으로서는 다르지 않다. 그래서 수기를 준다.”라고 하였다. 뒤에서 분별해야만 한다. 이것은 여섯 가지 해석 방법 중 대수석(帶數釋)이다.
체성(體性)을 논하자면 수용신은 사지심품(四智心品)이 포섭하는 온(蘊) 등으로써 체성을 삼고, 법신은 진여를 체로 삼는다. 총상(總相)으로 체를 나타내면, 일승문(一乘門)에서는 교(敎)·리(理)·행(行)·과(果)를 일승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일승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매우 많고 번역하는 사람도 한명이 아니어서 뜻이 매우 깊고 멀다. 이 때문에 지금도 옛날에도 논쟁이 일어났다.
첫째, 진제(眞諦) 등의 한 무리의 여러 논사들은 <법화경> 등 여러 경전과 논에 의거해서 모두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열반경>에서 “‘25유(二十五有)에 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아(我)는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뜻이다.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으니, 이것이 나라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제25권에서 “중생의 불성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평등하여 비유하자면 허공과 같아서 모든 중생이 똑같이 그것을 함께 한다.”라고 하였다. 또 제27권에서는 “사자후(師子吼)는 결정된 말을 말한다. 일체 중생이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집에 우유[乳]와 낙(酪)이 있는데 그 사람이 묻기를 ‘그대는 소(蘇)가 있습니까?’ 라고 하자 답하기를 ‘나는 가지고 있다.’ 라고 하였다. 낙은 소가 아니지만 교묘한 방편으로써 결정코 얻을 것이기 때문에 소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중생 또한 그와 같아서 모두 마음이 있으니, 무릇 마음이 있다는 것은 결정코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는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나는 모든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말한다.”라고 하였다. 또 제33권에서는 “모든 중생은 똑같이 불성이 있고, 모두 같은 승이고, 같은 해탈이고, 같은 인(因)이고, 같은 과(果)이고, 같은 감로(甘露)이다. 모두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얻을 것이니, 이것을 한 가지 맛[一味]이라고 한다.” 라고 하였다.
또 <법화경>에서 말하기를 “시방의 부처님의 나라 안에 오직 일승법만이 있다. 이승도 삼승도 없으니 부처님께서 방편으로 말씀하신 것은 제외한다.”라고 하고, 또 “오직 이 한 가지만 사실이며 나머지 두 가지는 진실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 <승만경>에서는 “성문과 연각 모두 대승에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또 <수진천자소문경(須眞天子所問經)>에서는 “문수사리가 말하기를 ‘일체 중생은 모두 부처가 된다. 그대들은 의심하지 말라. 왜 그런가? 일체 중생은 마땅히 여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자세한 것은 그것과 같다.
또 <입능가경>에서 오승성(五乘性)에 대해 밝히면서 말하기를, “천제(闡提)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하나는 모든 선근(善根)을 불태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중생을 가엾게 여겨서 서원을 다하도록 만든 것이다. 두 가지 가운데 첫째 것을 따르면 성불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경들에 준해 보면 무성유정(無姓有情)도 성불할 수 있다.
또 <섭대승론>에서는 “다섯째 승(乘)을 구제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다.”라고 하였고 다음에는 “근성(根性)이 정해지지 않은 성문은 거기에 편안히 설 수 있으니, 대승을 수행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섭대승론석>에서는, “만일 신(信)등 다섯 가지의 근[五根]을 얻었다 해도 결정된 근이라고 하지 않으니 아직 성도(聖道)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일 알지 못하지만 알고자 하는 근[未知欲知根] 등의 세 가지 근[三根]을 얻었다면 근기가 정해졌다고 하니 성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만일 정위(頂位)에 이르면 성(性)이 정해졌다고 하지 않으니 네 가지 악도(惡道)를 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인위(忍位)에 이르면 성(性)이 정해졌다고 하니 네 가지 악도를 면했기 때문이다. 만일 소승의 해석에 의하면 근기가 정해지지 않고 성이 정해지지 않았다면 소승을 전변시켜 대승을 만들 수 있다. 만일 근성이 정해졌다면 전변시킬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성문은 소승을 고쳐 대승으로 한다는 뜻이 없다. 어떤 것을 일승이라고 하는가?
지금 대승의 해석에 의하면 보살도를 오로지 닦지 않는 것을 모두 근성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성문이 소승을 전변하여 대승으로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대승과 소승의 사람을 편안히 세워 대승을 수행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대지도론>에서 “네 가지 종류의 도(道)가 있으니 인천도(人天道)와 삼승도(三乘道)를 합하여 네 가지가 된다. 보살의 법은 중생을 인도하여 대도 가운데 두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대도에 들어간 사람은 삼승 가운데 두고, 만일 열반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은 인도와 천도의 복된 즐거움 가운데 두어 열반의 인연을 만든다.” 라고 하였다.
또 <법화경론>에서 말하기를, “성문에 네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 결정성문(決定聲聞), 둘째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 셋째 퇴보리성문(退菩提聲聞), 넷째 응화성문(應化聲聞)이다. 두 성문은 여래가 수기를 주니 응화성문과 퇴보리성문이다. 결정성문과 증상만성문은 근기가 아직 익지 않았기 때문에 여래께서 수기를 주지 않으신다. 보살에게 수기를 준 것은 방편으로 발심하도록 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글에 의하면 무성유정이 반드시 있는 것이 아니고, 성(性)이 정해진 성문과 독각이 반드시 성불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심밀해탈경>과 <유가사지론> 등에서 결정코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은 근기가 익지 않은 때에 의거해서 말한 것이지 반드시 성불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성론(寶性論)> 제2권에서 말하기를, “‘일천제는 항상 열반에 들지 못하여 열반의 성(性)이 없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
‘대승의 인(因)을 비방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다. 나아가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의한 것이다.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다. 그가 실제로 청정한 성품이 있기 때문에, 그가 항상 끝내 청정한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라고 하였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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