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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四無記- 부처님은 정말 형이상학적 질문에 답하지 않았을까?

절대적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는 사물의 실재적 존재방식인
연관지어 일어나고 소멸하는 인과법과 연기법에 합치하지 않아
知的으로 감당 안되는 문제들을 붙잡고 씨름하는 것을 경계하라

 


 

경전에 등장하는 부처님의 무기(無記=침묵)의 이유는 한마디로 생노병사의 괴로움을 극복하고 열반으로 나가는데 형이상학적 질문은 도움이 안되는 것이어서 부처님이 답변을 하지 않았다고  기존 불교계는 주장해 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식의 경전 해석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만은 없다. 부처님은 다양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해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분이었다. 약간의 억지를 부리자면 아마도 제자들이 이 주제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잘 암송하지 못해서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 
부처님이 대답하지 않은 열네 가지 무의미한 질문(十四無記)은 다음과 같다.  

①세계는 영원한가? 
②세계는 무상한가? 
③세계는 영원하면서 무상한가? 
④세계는 영원하지도 무상하지도 않은가? 
⑤세계는 유한한가? 
⑥세계는 무한한가? 
⑦세계는 유한하면서 무한한가? 
⑧세계는 유한하지도 무한하지도 않은가? 
⑨여래(如來)는 사후(死後)에 존재하는가? 
⑩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 않는가? 
⑪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가? 
⑫여래는 사후에 존재하지도 존재하지 않지도 않은가? 
⑬목숨과 신체는 같은가? 
⑭목숨과 신체는 다른가? 

이중 앞의 8개 질문은 18세기 독일철학자인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의 ‘선험적 변증론’에서 다루었다. 칸트는 ‘도그마적 형이상학’에서 ‘시공간의 유무한성’을 논하며 시간과 공간이 유한하며 무한하기도 하다는 이율배반에 대하여 모두 옳다는 논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렇듯 지적으로 받아 들일 수 없는 논리는 수학이나 논리학, 자연과학의 밖에 존재하는 것으로서,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비판철학의 입장에서는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것들이다. 
부처님의 입장에서도 이 14가지의 질문은 흔히 그 성격을 무의미하다는 뜻에서 즉 열반 또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을 돕는 실천적인 물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불교가 철학과 형이상학에 대해서는 쓸모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사변적 철학에는 무관심하다고 볼지 모른다. 그리고 불교는 오로지 명상 수행 등 실천적 가르침에만 관심있는 교학에 한정짓는다고 볼지 모른다.

부처님 재세시 당시의 철학자들은 결국 해결되지 않는 형이상학적 문제로 논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확집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 결과로 생각지도 않은 죄악을 범하고 있었다. 부처님은 이와 같은 논쟁은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하여 논쟁에 가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부처님은 형이상학에 대한 의문들을 답이 없다는 이유로 설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14무기, 즉 대답을 하지 않았다는 경전의 기록을 해석함에 있어 부처님이 답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부처님은 인간에게 지적탐구와 연구 영역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이러한 형이상학적 문제들과 씨름하느라고 지나친 노력과 몰두를 경계하라는 의미가 드러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지나치게 교조적 신봉을 가진 불교계의 해석을 따르다보면 석가모니가 형이상학적 문제들을 폄훼하고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과연 부처님이 그러한 분이셨을까? 
근대철학에 따르면 실질적 문제해결을 위해서 형이상학적 사유는 무의미한 사변이 아니라 실천을 위해 변증법적 유의미성을 갖는다. 그래서 형이상학적 질문들을 논리학과 철학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시간 낭비 없이 진정한 수행이나 실천적 신행의 길로 나가는데 더 도움이 된다. 
한편 서양철학은 17세기부터 인간의 지적탐구에 대해 가능한 두 가지 영역을 분류했다. 칸트는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라는 영역으로 구분했는데, 관념과 사실이라는 명제에 대한 데이비드 흄이나,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라는 라이프니츠의 견해들에 의하면 수학과 논리학. 자연과학만이 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고, 신학이나 형이상학은 사기와 기만에 찬 환상을 다룬다고 폄훼한다. 
부처님도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물어서는 안되는 엉뚱한 질문들을 꿰뚫어보셨고, 사성제를 통해 열반에 이르는 길에 집중하지 못하고 지적으로 감당이 안되는 문제들을 붙잡고 시름하는 것을 경계하라고 하셨던 것이다. 20세기의 형이상학에 대한 서양철학의 결론을 2천5백년 전부터 부처님은 잘 알고 계셨던 것이다.     
14무기에 대한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나오는 부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다.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다.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세상은 시간적으로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합당하지 않고 법(法)에 합당하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유한하다. 우주는 공간적으로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다.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도 존재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후에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등의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이유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합당하지 않고 법(法)에 합당하지 않으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법(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경전에 따르면 14무기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두 가지 판단이 있음을 시사한다. 부처님은 마하가섭과의 대화에서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가 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용어로는 존재론의 견해를 상견(常見), 비존재론의 견해를 단견(斷見)이라고 하며, 이 두 견해를 극단적인 견해라는 의미에서 변집견(邊執見) 또는 변견(邊見)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사람들이 두 가지 견해에 빠져 있는데, 그 두 가지는 있음(有)과 없음(無)의 견해다”라고 말했다. 이 두 견해에 얽매여 있는 한,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작용을 하지 않는 것에 힘을 쏟고 있는 것이므로, 해탈에 도달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며 공간적으로 무한하고, 자아와 육체는 별개이며, 여래는 육체의 죽음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명제들은 존재론의 견해이다. 반면 우주는 시간적으로 영원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유한하고, 자아는 육체와 동일하며, 여래는 육체의 죽음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들은 비존재론의 견해이다. 이 두 견해들은 석가모니 재세시, 인도의 여러 종교적 · 철학적 학파들에서 주장되었다. 존재론의 견해는 대체로 브라만교가 지닌 견해이며, 비존재론의 견해는 대체로 유물론자와 쾌락주의자들이 지녔던 견해였다. 
부처님은 이러한 존재론와 비존재론의 도그마에 빠지기를 거부하고 다음의 두 가지를 경계하고 있었다. 첫째는 두 견해가 논리적인 추론을 따라 “절대적 또는 극단적으로” 발전했을 때 가져올 윤리적인 결과이며, 둘째는 “절대적 또는 극단적”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과는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즉 절대적 존재론을 믿는 사람들은 자아가 항상하며 불변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자아는 성질상 불변이기 때문에 육체는 죽더라도 자아는 죽지 않는다고 본다. 부처님은,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육체의 행위는 자아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지 않게 되므로 육체가 무엇을 하든지 상관 없게 된다고 말한다. 즉, 자아가 영원하고 불변이므로 육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건 자아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사유로 발전하여, 육체를 통해 비도덕적인 행위를 해도 전혀 자아에게 미치는 영향이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견해는 인과의 법칙 또는 연기의 법칙에 합치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자아와 육체는 동일하며 자아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소멸된다는 견해를 가진 경우에도, 이러한 주장이 맞다면, 삶에서 육체의 행위를 제한해야 할 필요가 없게 되므로 육체가 무엇을 하든지 간에 상관 없게 될 것이라고 부처님은 말했다. 즉, 육체를 통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그 과보가 이어질 다음 생이 없으므로, 무슨 수단을 동원하건 살아있는 한 삶을 최대한 쾌락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극단적인 결론을 나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래서 절대적 존재론과 비존재론의 견해가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방식, 즉 인과법과 연기법에 합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부처님은 사물들의 성질에 대해 절대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을 피하고, 형이상학의 절대적 범주의 개념들이라는 것이 사물들의 실제 모습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제주불교신문  jejubulgy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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