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치승원② 대승불교로 분화되기 전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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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치승원② 대승불교로 분화되기 전 초기불교의 교학과 수행공동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2.04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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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여행작가)
대탑의 문의 조각된 셈세한 브얄라(vyala)상과 부조들. 브얄라는 호랑이·코끼리·새 또는 다른 동물의 머리에 몸은 사자 같은 혼합동물로 사람과 싸우거나 코끼리를 덮치는 형상을 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 동물은 태양을 상징하면서, 뱀을 잡고 있는 독수리를 묘사하여 물질에 대한 정신의 승리를 나타낸다.

영국군에 의해 1818년에 발견된 산치 대탑은, 아소카 왕이 건립한 이후 계속해서 확장되었다.
탑 내부에는 여러 구조물이 들어차 있으며 전체적으로 대규모 석조난간에 둘러싸인 형태이다. 석조난간에 있는 4개의 문에는 붓다의 생애를 그린 정교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산치 대탑 건물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하늘을 나타내는 반구형의 돔을 기본형태로 하여 이루어져 있다. 꼭대기에는 세계의 산을 의미하는 정4각형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여기에 솟아 있는 높은 기둥은 우주의 축을 상징한다. 높은 기둥에는 여러 가지 하늘을 나타내는 우산이 달려 있다.
이밖에도 작은 불탑과 집회를 열었던 회랑, 아소카 왕의 석주, 승원을 비롯해 수많은 유물 잔재와 400개가 넘는 비문 기록도 남아 있다.
산치는 부유하고 인구 밀도가 높은 도시인 위디사에 근접해 있어 불교 수행을 하는데 이상적인 필요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산치에 있는 봉헌 비문에 의하면 불교 사원설립에 필요한 경제적 지원은 위디사의 부유한 상인 계층의 신앙심으로 부터 나왔음을 알려준다. 산치는 또 두 개의 중요 무역로에 있을 뿐만 아니라 베뜨와 강과 베스 강, 두 개의 강의 합류점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들이 마우리아왕조 이후에도 사원이 번성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라마그라마탑을 순례하는 아소카 대왕 부처님의 열반 이후, 화장된 사리는 8개 왕국에 분배되었다. 각 왕들은 그의 수도나 근처에 불탑을 지었고, 그 안에 사리와 재의 각 부분이 안치되었다. 이 8개의 탑은 다음 위치에 있었다. 첫째, 불리(Buli) 사람들의 도시인 알라카파(Allakappa)로, 이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 둘째, 샤카(Shakya) 왕국의 수도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로 정확한 탑의 위치는 논란이 있다. 셋째, 말라 왕국의 수도 쿠시나라, 넷째, 말라 왕국의 파바, 다섯째, 마가다 왕국의 라자가하, 여섯째, 콜리야(Koliya)왕국의 라마그라마(Ramagrama=Koliyanagara라고도 함), 일곱째, 밧지(Vajji) 왕국의 수도 베살리(Vesali), 여덟째, 베타디파(Vethadipa, Vethadipaka Brahmins)의 정착지로 이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현재 알려져 있지 않다.불멸 약 300년 후, 아소카 대왕은 이중 불탑 7개를 열고 부처님의 유물과 사리를 제국 전역에 84,000개의 불탑을 건립해 재분배했다. 그런데, 그중 하나였던 콜리야 왕국의 라마그라마탑의 사리는 분배하지 못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큰 뱀이 라마그라마탑을 지키고 있었고 아소카는 유물을 발굴하지 못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라마그라마탑에는 부처님의 유물이 들어있는 유일한 원래의 탑으로 남게 되었다. 그래서 이 탑은 부처님의 열반 이후 최초로 건설된 탑신앙의 경건한 순례지의 대상이었다. 탑의 높이는 7미터이고 현재 땅속에 묻혀 있으며 추가 연구를 기다리고 있다..


승가왕조에서도 산치의 사원들은 계속 그 명성을 이어갔고 그 이후에 발달한 사따와하나 왕조에서도 종교적인 영향력과 위치는 힘을 잃지 않았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이란 북동부에 있던 시치토-파르티안왕조와 쿠샨왕조의 침공과 끄샤뜨리바 왕조가 들어서자 다소  산치의 건축 활동을 약화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인도 북쪽 간다라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치도 불상을 조성하지 않았던 초기 불교 전통에서 탈피해 불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마투라의 영향을 크게 의존했기 때문에 불상을 발전시키는 방향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다. 
끄샤뜨리빠의 통치에 이어서 등장한 굽타왕조는 예술적인 발전에 필요한 경제와 정치적 안정을 가져왔다. 이때 산치에도 사암으로 만들어진 마투라양식의 불상이 조성되었으므로 산치에 불교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굽타시대에 조성된 사원에서 굽타시대의 뛰어난 예술성을 볼 수 있고 산치 대탑의 네 입구에 모셔진 불상은 굽타시대의 것이다.

기단부만 남은 승원터와 물을 담아서 사용했던 거대한 수조가 보인다.


화려했던 굽타시대가 끝나고 인도는 다시 지역에 따라 여러 왕조가 들어섰다. 그때 훈족에 의해 인도 서부 대부분과 중앙지역이 점령을 당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어서 하르샤와르다나 왕이 인도 북부에서 정치적 통합을 성취하면서 왕의 지지로 인해 산치 불교사회를 번성하게 하였고 여러 수도원들과 사원들이 세워졌다. 하르샤와르다나 왕이 죽은 후 인도 북부는 또다시 수많은 왕조가 들어서서 정치적인 혼란에 빠졌지만 산치는 이러한 정치적 변화와 영향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산치에서 불교는 12세기를 정점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13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비쉬누, 가네샤 등의 신상과 브라만교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지만, 이 시기 이후로는 더 이상 불교 건축물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14세기 영국의 식민지 시대 개막과 함께 산치는 버려졌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1818년이 되어서야 영국의 테일러 총독이 산치유적을 발견했지만, 대중들의 지나친 관심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와 도굴가들에게 손상을 입게 된다.

18호 승원유적


1822년에는 보팔에 근무하던 존슨 대위가 산치대탑의 한쪽 면을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개방함으로써 공기가 들어가 서쪽 문과 난간이 끝나는 부분이 붕괴되었다. 1851년 커닝엄은 메이지와 함께 2번 탑과 3번 탑을 발굴하여 그 속에서 유골함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에 의해 산치대탑의 중앙에서 작은 기둥이 주저 앉으면서 더 이상의 유골은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약탈과 잡목들이 무성하게 자라면서 탑들도 황폐화 되었다.
자미다르라는 사람은 아소카 석주를 사탕수수 즙을 짜기 위한 압축기로 사용하려고 파괴하기도 하였다. 
1881년, 영국군 콜 소령이 산치 지역을 보수 보존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리고 1912~1919년 인도 고고학회의 총 지휘자였던 마샬에 의해 대규모 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그러다가 1936년에 인도인 하미드가 고고학적 발굴을 하면서 그동안 감춰졌던 사원의 베일이 벗겨지기 시작했다.

대탑의 각 문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조각되어 있다. 이 장면은 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을 7왕국의 왕들이 참배하고 있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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