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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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 팔공산 은해사(銀海寺)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2.1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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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96)
1750년 처일과 근헌이 그린 은해사 대웅전 <아미타후불탱화> 크기 435x311cm

경북 영천시 팔공산에 있는 은해사는 불, 보살, 나한 등이 계신 모습이 마치 은빛 바다가 춤추는 극락정토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한편으로는 은해사 주변에 안개가 끼고 구름이 피어 날 때 그 풍경이 은빛 바다가 물결치는 것 같다고 해서 은해사라고 붙여졌다고도 한다. 
1943년에 만들어진 은해사사적비에 의하면 은해사는 신라 41대 헌덕왕이 즉위한 해인 809년 혜철(惠哲)국사가 해안평에 해안사(海眼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려시대인 1270년(원종 11)에 홍진(弘眞)국사에 의해 중창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1515년(중종 10) 후일 인종이 된 왕자의 태를 인근에 묻고 은해사에서 수호토록 했다. 1545년(명종 1)에 인종의 태실에 비를 세우며 국가에서 하사한 돈으로 현재 장소로 법당을 옮겨 이름을 은해사로 바꿨다고 한다. 하지만 1847년 대규모 화재로 극락전을 제외한 천여 칸의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어 1849년에 중창불사를 했다. 은해사사적비가 만들어진 1943년까지만 해도 건물이 35동 245칸이 되는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으나 현재는 그 규모가 그때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6.25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더욱 쇠락하여 1970년대부터 중건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일제강점기에 조선 31본산, 경북의 5대 본산, 조선의 4대 부유한 사찰 중 하나였고, 현재 조계종 제10교구 본사가 이 은해사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이 수식어에 비하면 현재의 규모가 다른 사찰에 비하면 작은 것은 아니지만 화려했던 과거 명성에 비하면 한참 부족한 규모이다.      
은해사사적비에 전하는 창건 시기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지역이 삼국시대 이래 많은 사찰들이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창건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일단 통일신라시대를 추정할 수 있는 유물이 전하지 않는다는 점과 창건 시기가 맞는다면 창건주 혜철(785~861)이 구산선문 중 하나인 동리산파를 연 혜철국사가 아닐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혜철은 당나라에 유학해서 나중에 국사가 된 분으로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는데, 2년여 뒤에 은해사를 창건했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시대에 법당을 옮겼기 때문에 신라시대 유적을 확인할 수 없는 경우도 있겠지만 창건 시기와 창건주 문제는 더 연구가 필요한 듯하다.

1792년 왕희봉 등 16명이 참여하여 그린 은해사 백흥암 <감로탱>크기 196x196cm


은해사의 절집들은 대부분 1849년 중창 불사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건물에서 고풍스런 맛을 느낄 수는 없다. 은해사에서는 가능하면 차를 타고 들어가지 말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잘생긴 소나무들이 늘어선 숲길을 걸어서 들어가자. 비록 숲길을 지나서 만나는 절집들이 숲길에서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지 않지만 숲길에서 받은 충만한 느낌이라면 충분히 참을 만하다. 아마 과거 넓었던 절터가 소실되어 다시 창건되는 과정에 많은 건물들이 옮기고 고쳐지다 보니 정연한 느낌보다 불필요하게 크고, 건물 각각이 따로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절집에 계신 부처님께서 순례객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주신다. 
은해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을 한 절집이다. 1849년 중창 당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내부에 봉안된 불상과 불화는 석가모니불상이 아니라 아미타불이어서 화재 때 소실되지 않았던 극락전에 현판만 대웅전으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불상 뒤에 걸린 아미타후불탱화는 1750년 처일(處一)과 근헌(謹軒) 두 화승이 그렸다. 세로 4.3m, 가로 3.1m의 거대한 화면에 서있는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세 분을 그린 그림이다. 전체적으로 무거운 느낌을 주는데 색상도 더 어둡게 산화되어 그런 분위기가 더 커졌다.
이 불화를 그린 처일이 같은 해에 다른 화원과 함께 그린 은해사괘불은 이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괘불(보물 제1270호)은 화면 크기만 세로 10m, 가로 4.7m의 대작으로 보총(普摠)과 처일 두 명이 그렸다. 석가모니불을 단독으로 그린 영산회괘불로 추정된다. 화면 가득히 채워진 다른 그림에서 보기 드문 화려한 꽃과 장식적인 보개가 황색바탕과 잘 조화를 이루어 화사하면서 격조 높은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림을 그린 화승 이름에 보총이 먼저 쓰인 것으로 보아 수화사인 그의 영향이 많이 작용하여 처일이 수화사가 되어 그린 아미타후불탱화와 다른 분위기를 준다. 본존의 자세나 비례는 거의 비슷한데 아래로 내려뜨린 손 모습을 보면 아미타후불탱화의 손 모습이 더 경직되었다. 얼굴 모습에서도 미세한 차이가 있다. 전체적으로 같은 시기에 그려진 이들 두 그림이 분위기에서 차이가 큰 것은 아마 절집 안에 봉안 되는 것과 야외에 걸리는 그림이라는 봉안처와 기능이 다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은해사에서 북서쪽으로 들어가면 백흥암이란 비구니스님들의 수행처가 있다. 보물 제790호로 지정된 극락전의 단아한 느낌이 좋고, 극락전 안에 있는 수미단은 현재 남아있는 불단 가운데 가장 아름답다고 평가된다. 그래서 건물보다도 훨씬 먼저 보물(제486호)로 지정되었다. 이 백흥암 대웅전에 봉안되었던 감로탱 또한 볼 만하다. 1987년 도난당했다가 1998년에 되찾은 우여곡절이 많은 불화이다. 

1750년 보총과 처일이 그린〈은해사 괘불〉화면 크기 1,056x474cm


감로탱은 우리나라의 조상숭배의식과 불교가 결합되어 만들어졌다. 백중날 행해지는 우란분재에 영가를 천도하는 의식에 사용되는 불화이다. <우란분경>에 목련존자가 아귀도에서 고통을 받는 어머니를 구제하기 위해 부처님께 방법을 묻자, 부처님께서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 부처님과 스님께 음식을 공양하고 재를 올리면 지옥에 빠진 영혼들이 극락에 인도된다고 일러주었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상단에는 아미타삼존을 비롯한 일곱 여래와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인로왕보살을 배치하고, 중단에는 재를 올리고 공양하는 장면과 천도 대상인 아귀가 공양 받는 장면이 그려졌다. 감로탱에서 가장 흥미 있는 것은 하단에 그려진 장면이다. 현실 생활에서 죽음을 맞는 다양한 장면, 즉 물에 빠져 죽는 장면, 줄타기를 하다 떨어져 죽는 장면,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장면 등 다양한 그림이 풍속화처럼 그려진다. 각 장면 옆에는 그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알리는 글이 적혔다. 찬찬히 뜯어보면 흥미로운 장면들이 많다. 백흥암의 수미단 조각과 함께 답사를 즐겁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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