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에세이 - 비눗방울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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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에세이 - 비눗방울 놀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2.18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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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누구든지 비눗방울놀이를 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또래 아이들과 함께 마당에서 빨대 끝에 비눗물을 묻히고 바람을 불어 동그란 비눗방울을 만드는 재미에 푹 빠졌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혹시나 비눗방울이 터질까 봐 조바심 내며 비눗방울에 눈길을 보내지만, 허공에 날린 비눗방울은 톡톡대며 터진다. 비눗방울은 거품과 같아서 연약하고 잡을 수 없다. 쥐는 순간에 터져버리기 때문이다.
누군가 “요즘 재미있게 즐기는 게 뭐야?”라고 칠순의 나에게 물었다. 건강의 소중함을 깨닫고 매일 걸어서 출퇴근하고 일주일에 한 번은 명상칼럼을 쓰고 또 경전을 읽는다고 말한다. 이게 나이 듦의 즐거움이라면 즐거움이다.
보통 사람들이 일상에서 느끼는 행복감은 대부분 비슷하다. 드라마를 보거나 친구나 애인일랑 함께 있을 때,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떨 때, SNS를 할 때 등등. 하지만 그런 즐김의 시간이 지나서 나 홀로 있으면 불안과 외로움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그 허전함을 메우기 위해 또 달콤하고 즐거운 뭔가를 찾는 게 보통사람들의 습기習氣이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지나 온 삶의 궤적을 되짚어 보니, 마치 물에서 생긴 거품처럼 감각적 욕망에 대한 애착으로 샐 수 없는 비눗방울을 만들었던 것 같다.
부처님께서「세상 경」(S1:70)에서 “여섯에서 세상은 생겨났고 여섯 때문에 친교를 맺느니라. / 여섯을 취착하여 세상은 전개되며 여섯에 세상은 시달리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앞의 ‘여섯’이란 눈·귀·코·혀·몸·마노(眼·耳·鼻·舌·身·意)의 여섯 가지 안의 감각장소(處, 아야따나)를, 뒤의 ‘여섯’이란 형색·소리·냄새·맛·촉감·법(色·聲·香·味·觸·法)의 여섯 가지 밖의 감각장소이다.
안과 밖의 여섯 가지의 접촉을 통해 찰나적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지고 알아차리는 여섯 가지의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 앞에서 펼쳐지는 세상이란 바로 이 세 가지의 법을 통해서이고 그 이외에 어떤 초월적 세상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이다.
대상과 접촉하면 마음이 알아차리는 즉시 느끼고 몸과 말과 뜻으로 의도적 행위를 하게 된다. 좋아하는 대상엔 달라붙고, 싫어하는 대상엔 혐오감을 내고, 좋지도 싫지도 않은 대상엔 무덤덤해진다.
안과 밖의 12가지 감각장소가 서로 얽혀드는 게 윤회의 장이고 사바세계의 현주소이다. 초기경전에서는 12가지 감각장소는 예외 없이 연기적 존재이고 조건발생이고 무아無我라고 가르친다.
오온五蘊과 갈애가 일어나는 장소가 12처이다. 밖의 형색을 아름답다는 인식을 갖고 보면서 거기에 욕망을 일으키고 즐기고 기뻐함은 갈애에 기인한 허깨비 생각이 일어난 것이다. 그 헛된 생각이 니밋따(nimitta, 相)를 만든다.
수행자의 마음이 극락세계를 칠보로 장엄되고 고대광실 기와집이 있는 것으로 형상화한다면 마치 그 세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환영이 생긴다.
니밋따를 만드는 자는 없다. 탐욕·성냄·어리석음이 인간을 탐욕스럽게 하거나 미워하게 하거나 어리석게 하여 평범한 사람이나 고귀한 사람을 만들고, 또 이런 오염된 정신상태가 영원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다는 잘못된 환영(maya, 幻)을 일으킨다. 어떤 것에 대해 집착하고 있거나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은 환영의 재료가 된다.
일상에서 감각능력은 감각적 대상에 영향을 받아 시달리고 비포장도로에 놓인 거울처럼 더럽혀져 있지만 멈춤[止]과 통찰[觀]을 성취한 사람의 감각능력은 상자 안에 놓인 거울처럼 맑다.
번뇌는 마음 밖 인연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일 뿐이다. 진리에 대해 큰 뜻을 품었기에 여섯 악기가 연주하는 유희에 탐닉하지 않고, 법(dhamma)에 시선을 꽂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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