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운악산 봉선사(奉先寺)와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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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주 운악산 봉선사(奉先寺)와 수락산 흥국사(興國寺)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19.12.26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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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사찰순례 (97)
1735년 법총 등 5명이 그린 <봉선사 괘불>

경기도 남양주와 포천, 가평에 걸친 운악산은 예로부터 명산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 산 기슭에 천년 고찰 봉선사가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는 고려 초기인 969년(광종 20)에 법인국사 탄문(坦文)이 창건하여 운악사(雲岳寺)라고 불렸다. 그 뒤 운악사는 조선 세종 때 선교양종으로 통합할 때 혁파되었고, 1469년(예종 1) 세조의 비 정희왕후 윤씨가 운악사 인근에 안치된 세조의 능인 광릉을 보호하기 위해 89칸의 규모로 중창한 뒤 봉선사(奉先寺)로 이름을 바꾸었다. 1550(명종 5)년 불심이 돈독했던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보우대사를 발탁하여 퇴락하던 조선 불교를 중흥시켰는데, 이때 서울 삼성동에 있는 봉은사를 선종의 본산으로, 봉선사를 교종의 본산으로 삼았다. 봉선사는 교종의 우두머리 사찰이 되어 전국 교종 사찰들을 관장하게 되었고, 1552년에는 봉선사에서 교종 승려를 뽑는 과거를 치렀고, 승려교육진흥을 위한 교종의 중추기관이 되면서 사찰의 규모도 커졌다. 하지만 문정왕후 사후 보우대사가 제주로 유배 간 후 봉선사의 사세는 내리막길로 접어든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한국전쟁 때 서울 인근에 자리하고 있고 접근하기가 쉬워 계속 사찰이 불타는 비운을 겪는다. 1960년 무렵부터 절을 재건하는 불사가 시작되었고 1990년대 이후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져 현재의 가람배치가 완성되었다. 주요 법당들의 기본 골격과 석축은 옛것을 그대로 따랐다.  
 인근에 광릉과 수목원이 있어서 봉선사 가까이 가면 숲이 만들어준 상쾌한 나무 냄새가 도시에서 찌든 폐를 시원하게 훑어준다. 길 양옆에 하늘을 찌르듯 늘어선 낙엽송을 따라 걷는 기분이 좋다. 비록 광릉과 수목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무분별하게 들어선 식당과 가게들이 그 운치를 깨뜨리지만 봉선사 경내에 들어서면 그것도 금방 잊힌다. 
 봉선사의 중심 법당은 큰법당이다. 보통은 법당 이름을 대웅전이라 할 텐데 봉선사에는 큰법당이라는 한글 현판이 걸려 있다. 이 법당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했고, 1964년 동국역경원을 만들어 한문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것을 평생의 원력으로 삼았던 운허(耘虛) 스님이 1970년에 건립한 건물이다. 법당 이름도 당신의 염원인 한글 대장경 번역과 마찬가지로 한글로 대신했다.  

1792년에 왕실 발원으로 그려진 남양주시 흥국사 시왕도 중 다섯 번째 그림인 염라대왕


 봉선사는 여러 번의 병화로 오래된 법당과 불교 문화재가 대부분 소실되어 남아 있는 것이 적다. 다행히 보물 제397호로 지정된 봉선사대종과 근래에 보물 제1792호로 지정된 봉선사괘불이 전한다. 이외의 불화들은 대개 1900년대 이후에 제작된 것들이다. 한국전쟁 이후 맨땅에 처박힌 봉선사대종의 사진을 통해 당시 참담한 상황을 어느 정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 봉선사괘불이 온전히 남은 이유는 평소 걸어두는 그림이 아니라 괘불함에 넣어 보관하는 그림이기 때문에 다행히도 훼손되지 않은 것 같다.      
 봉선사 괘불은 1735년 상궁 이성애가 그해 사망한 숙종의 후궁이었던 영빈김씨를 추모하기 위해 발원한 것이다. 각총(覺聰)을 중심으로 다섯 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그렸다. 높이 870㎝, 폭 469㎝의 크기로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 삼존과 문수, 보현 등 6분의 보살,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여러 성중을 표현한 그림이다. 밝은 황토색과 녹색조의 의복과 부드러운 옷주름, 연분홍의 발그스레한 부처님의 상호, 8등신의 날씬한 보살들의 유연한 자세와 담청색과 뇌록색 광배 등에서 매우 화사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받는다. 아마 바탕 재질이 비단이나 마가 아니라 종이여서 그런 느낌이 더 강한 것 같다. 그림의 하단 중앙 즉, 비로자나부처님의 발치인 양쪽 보살들 사이에 그려진 용왕과 용녀,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천동과 천녀들의 모습이 특이하다. 용왕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하지 못했던 분들은 이 그림을 통해 용왕의 모습을 확인해 보는 것도 좋겠다.         

<봉선사 괘불> 하단 중앙에 그려진 용왕, 용녀와 천동, 천녀


 봉선사의 말사 중 조선 후기에 서울 인근에서 불화를 그리는 화승들이 머물며 솜씨를 연마하던 절이 있다. 바로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이다. 이 절은 인근에 선조의 아버지인 덕흥대원군의 묘가 있어서 그의 원당이 절에 지어지면서 왕실의 후원을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선조 이후의 왕들이 모두 선조의 직계 손이기 때문에 왕실의 후원은 당연한 것이었다. 1790년(정조 14)에는 봉은사, 봉선사, 용주사(龍珠寺), 백련사(白蓮寺) 등과 함께 나라에서 임명하는 관리들이 머무르면서 왕실의안녕을 비는 오규정소(五糾正所)의 한 사찰로 채택되기도 했다. 이렇게 되자 절 살림이 좋아졌고 왕실의 상궁들이 자신이 모시는 상전의 발원을 위해 자주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불화를 그리는 화승들의 집합소가 되었다. 흥국사라는 현판과 여러 주련을 흥선대원군이 쓰는 등 조선시대 말기까지 왕실의 후원과 관심은 지속되었다.
 흥국사 시왕전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시왕도(十王圖)가 전해진다. 시왕도는 지옥을 관장하는 열 명의 왕을 그린 그림으로 말 그대로 나쁜 짓을 하면 지옥으로 가니 그러지 말라는 경계의 의미가 있는 불화이다. 1792년 왕실 발원으로 그려진 그림인데 원래 그림은 6점만 전하고 4점은 후대에 보완되었다. 열 명의 왕 중 다섯 번째 염라대왕의 그림을 보면, 선명하고 따스한 녹색과 빨간색을 주조색으로 하고 황색과 청색을 가미해 격조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사람이 죽으면 5x7일인 35일째 되는 날 영가는 발설지옥을 관장하는 염라대왕을 만난다. 상단에는 붓을 쥐고 있는 염라대왕이 묘사되었고, 하단에는 지옥 모습이 그려졌다. 하단 오른쪽의 둥그런 원은 업경대로 망자의 죄가 비치는 거울이다. 거울에는 망자가 생전에 소를 죽이는 모습이 담겨졌다. 염라대왕이 있는 발설지옥은 상대방을 헐뜯은 중생들이 가게 되는 지옥이다. 이 곳에서의 형벌은 죄인의 혀를 길게 뽑은 뒤 크게 넓혀놓고 나서 그 혀에 밭을 갈고 나무를 심는 것이다. 왼편 귀퉁이에 형틀에 묶인 망자가 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고 그 위에서 망자가 죽인 소가 쟁기질을 하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잔인한 그림이지만 최근 인터넷이나 SNS 댓글로 인해 연예인이나 학생이 목숨을 끊은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그처럼 근거 없는 비방이 한 사람의 생명을 앗아간 것을 생각하면 쟁기질이 아니라 대못을 박아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해를 마감하는 연말에 혹 올 한해 남을 아프게 한 말은 없었는지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갖자.

염라대왕이 관장하는 발설지옥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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