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도봉 ‘도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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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도봉 ‘도림사’
  • 양영길
    문학평론가
  • 승인 2004.10.14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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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지만 넉넉하여라 절이라 꽃도 더 아름답구나”

도내산 ‘절새미터’ 적거중 순교한 보우대사 일화 남아

‘절터’구전과 함께 기와편도…지금의 어도봉 자락

現 도림사 1951년 혜경스님·박을생 보살 창건



   
 
  어느덧 도림사는 창건 반세기를 넘겨 오늘을 맞고 있다.  
 
애월읍에서 면적이 가장 넓고 또 오름이 가장 많은 것을 자랑하는 봉성리에 이르러 어도봉이 있었다. 어도봉 남서쪽 기슭에 있는 도림사에 들어서려니 높고 푸른 소나무가 청청한 기운으로 반겨주었다. 전화를 걸었을 때 예사 벨소리가 아닌 불경소리 벨 서비스를 들을 때처럼 일상에 찌든 마음을 씻어 주는 듯했다. 주지이신 범현 스님은 육지로 공부하러 나가시고 8개월 째 도림사를 지키고 있다는 여일(如一) 스님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따뜻하게 녹차를 우려내시면서 신도들이 “가난한 절을 지켜 주셔서 고맙다”고 하더라는 말을 전하는 여일 스님. 조용해서 공부하고 수도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말을 하시면서 가난을 오히려 누리고 있는 듯 더 당당하게 불심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곳 도림사는 조선 명종 당시 불교 중흥에 앞장서다가 유배된 보우선사(普雨禪師, 1516∼1565)가 적거하다가 순교했던 곳으로 알려졌으나 한두 마디 이야기만 남아 있을 뿐 아무 것도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움도 함께 숨쉬고 있었다.

허응당 보우 대선사는 1565년 6월 제주에 유배되어 도내산(道內山, 지금의 어도봉) ‘절새미터’를 중심으로 적거하다가 같은 해에 순교했다. 당시 사림에서 요승, 또는 괴승으로 배척받고 있다가 최근 대선사로 복권(?)되고 있다. 척불 정책이 얼마나 심했으면 조그마한 기록조차 남기려 들지 않았을까. 절새미터 또는 ‘물통’으로 불리는 위쪽에 절터가 있었다는 이야기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산소 자리인데, 여기에 산소를 쓸 때 기와파편이 나왔다는 이야기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순교자 보우 선사』(한길사, 2000)를 쓴 박영기는 “조선 초 숭유억불의 암흑기에 한국불교의 명맥을 이은 선사”라고 하면서 이차돈 이후의 순교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보우 선사는 금강산에 들어가 수도하던 때부터 제주에서 순교할 때까지 쓴 483편의 시문들을 모은 <허응당집>을 남겼다. 이 문집은 보우 선사의 문인이었던 태균(太均)이 편집하고,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이 발문을 써 보우 선사가 제주에서 순교 당한지 8년만인 선조 6년(1573년)에 간행되었다. 숭유억불의 암흑기에 금서로 취급되었을 거라는 박영기씨의 추정은 사실인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았다. 이 문집이 1959년 일본에서 처음 발굴될 정도였으니…

도림사는 박을생 보살님께서 혜경 스님(오춘송 스님)과 함께 1951년 창건하고 일조 스님(현 애월읍 수산리 대원정사 주지스님)을 거쳐 범현 스님이 주지를 맡고 있다. 처음 초가집으로 시작하여 1953년 기와집을 지었으나 기초를 약하게 하여 오래가지 못하고 1980년경에 지금의 슬레이트 지붕의 대웅전을 마련하였다.

   
 
   
 
도림사가 있는 어도봉은 동서 두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그 형상이 봉황지세(鳳凰之勢)라고도 하고, 어린 봉황이 집으로 날아드는 옥봉귀소형(玉鳳歸巢形)이라고도 한다. 그 정상에 조선시대에 토축(土築)한 연대가 있으며 북동쪽 기슭에 포제단도 있다. 어도봉은 온순하고 너그러운 자모(慈母)의 심성을 닮은 능선을 동서로 길게 뻗고 봉성마을을 안을 듯이 보호하고 있었다. 어도봉 중턱에서 바라본 어도(지금의 봉성) 마을은 저 멀리 한라산과 여러 오름들을 거느리고 들불축제의 현장인 새별 오름과 함께 한가롭다.

도림사 문을 나서자 보우 선사의 단심(丹心)을 담은 부용꽃이 붉게 피어 있었다. 보우 선사께서 늘 바라봤을 멀왓(귀덕 3리) 저 멀리 비양도와 바다가 평화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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