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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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1.0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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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불교유적 순례를 시작하며
중국 시안에 있는 대안탑과 현장스님 동상  대안탑은 현장스님이 번역한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중국 시안에 있는 대안탑과 현장스님 동상 대안탑은 현장스님이 번역한 불경을 보관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의 불교는 삼국시대에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통해 전해졌다. 불교가 인도에서 시작된 종교이므로 중국 불교도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외부로부터 들어왔다. 하지만 불교가 발원된 인도에서 직접 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지금 중국의 영토는 서쪽으로 부탄, 네팔, 인도,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 등과 국경을 맞닿고 있지만 불교가 전래된 시기인 한나라시대에는 지금의 티벳과 신장자치구에는 다른 나라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들에 대해 중국에서는 ‘자신들 서쪽에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로 서역(西域)이라 칭했다. 
티벳과 부탄, 네팔, 인도가 맞닿은 지역은 히말라야라는 높은 산이 자리하고 있어서 실제로 사람들이 통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한무제 때 만들어진 실크로드는 그보다 더 북쪽인 지금의 신장웨이우얼자치구가 있는 지역에 만들어졌다. 이 길을 통해 중국에 더 가까운 지역에 있었던 나라들의 불교가 전래되었다. 이후 인도 및 서역의 승려가 직접 불교를 전파하러 중국으로 건너오거나 중국에서 불법을 구하러 인도로 가는 승려가 점점 늘어나게 되었다. 

법현스님과 현장스님 인도 순례 여정  법현은 399-414년까지 육로로 가서 해로로 귀환하였고, 현장은 629-645년에 육로로 갔다 육로로 귀환하였다
법현스님과 현장스님 인도 순례 여정 법현은 399-414년까지 육로로 가서 해로로 귀환하였고, 현장은 629-645년에 육로로 갔다 육로로 귀환하였다

 

불교가 중국에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에 관해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대표적인 이야기 몇 가지를 살펴보면, 먼저『광홍명집』에는 공자가 부처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는 공자가 살았던 시대보다 한참 후이자 불교가 이미 중국에 전래된 3세기 이후에 쓰인『열자(列子)』라는 책에서 인용하였다. 공자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 인정되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활동한 시기는 비슷한 때였고, 당시 인도와 중국은 교류가 없었으며 더구나 불교는 아직 인도라는 지역적인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기 때문에 중국에서 공자가 지닌 위상을 빌어 불교를 알리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으로 인도의 아쇼카 왕이 세운 팔만사천탑 가운데 일부가 중국에서 발견되었으며, 그 안에서 부처님의 사리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와 진시황 당시 불경을 가지고 중국에 왔다는 승려 석리방(釋利防) 또한 아쇼카 왕이 파견한 승려라는 ‘석리방 전교설’이 있다. 이 역시 후대에 쓰인『홍명집』,『역대삼보기』,『불조통기』등에 전하는데 중국의 불교도들이 인도에서 불교를 흥성하게 한 아쇼카 왕과 어떤 연관을 찾으려는 노력은 이해되지만, 인도에 전하는 아쇼카 왕의 비문이나 스리랑카의 연대기 어디에서도 아쇼카 왕이 중국에 불교를 전했다는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그리고 『위서』「석노지」에는 기원전 2세기 한무제가 흉노를 견제하기 위해 흉노 배후에 있는 월지에 사신으로 보냈던 장건이 오랜 기간의 여행 끝에 중국에 돌아올 때 불교에 관한 기록을 가지고 왔다는 ‘장건 전문설’이 전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장건이 여행한 지 700년쯤 지나서 쓰인 것이고 그 이전에 장건에 대해 언급된『사기』나『한서』등의 책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뢰하기 어렵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정착된 이후에 불교는 유교와 도교 신봉자들에 의해 비판을 받았다. 특히 왕실에서 신봉을 받는 경우 불교가 왕조의 수명을 단축시킨다고 비난하였다. 그 이유로 왕실에서 불교를 신봉하였다가 빨리 망한 왕조인 후진, 후조, 유송, 제나라 등을 예로 들었는데 그 나라가 각각 33, 24, 59, 23년밖에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에 대처하기 위해 불교에서는 불교의 중국 전래를 주나라 초기로 잡고, 그것을 보

오렐 스타인 3차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를 탐험한 영국탐험대 대장이었다.
오렐 스타인 3차에 걸쳐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를 탐험한 영국탐험대 대장이었다.

여주는 책을 만들었다. 주나라가 800년 이상 존속하였기 때문이다. 즉 불교는 주나라 소왕 24(갑인)년 4월에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때 천지가 진동하고 밤에도 사라지지 않는 열두 가지 색깔의 무지개가 나타나는 등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서방에 대성인이 탄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도 조선시대까지는 이 기록을 따랐었다. 
불교의 중국 전래설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후한 명제설’과 ‘이존불경구수설(伊存佛經口授說)’이 다. ‘후한 명제설’은 후한의 명제가 영평 10년(기원후 67) 어느 날 밤 금빛 나는 사람이 서쪽에서 내려오는 꿈을 꾼 뒤 서방에 불교가 있는 것을 알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그들이 인도로 가던 중 백마에 불경과 불상을 싣고 오던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난(竺法蘭) 두 사람을 만나 함께 낙양으로 돌아왔고, 명제가 낙양에 백마사(白馬寺)를 짓고 그 두 사람을 살게 하였으며, 그들은 그곳에서 가지고 온 경전을 번역했는데, 그것이 현존하는『사십이장경』이라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존불경구수설’로 전한 애제(哀帝) 때인 기원전 2년 박사제자 경로(景盧)가 대월씨의 왕사인 이존으로부터 불경을 구두로 전수받았다는 설이다. 이 설은 진수의『삼국지』에 위나라 사람 어환(魚豢)이 저술한『위략』을 인용한 것으로 사료로서 신빙성이 높아 가장 타당하다고 받아들여지고 있다. 1998년 중국불교협회에서 불교유입 2000주년 기념행사를 치른 것도 이에 근거한 것이었다.
중국에 불교는 기원 전후한 시기에 전래되었고, 이후 수나라가 통일하는 581년까지는 여러 왕조에서 불교를 수용하여 경전을 번역하고, 석굴사원과 다양한 불상을 만드는 시기였고, 수당대가 되면 인도 불교에서 완전히 탈피한 중국 불교가 완성되었다. 그후 당나라 중엽 안록산의 난과 회창 훼불시대를 맞으며 선종이 자리 잡게 되었다. 송나라 때 주희에 의해 신유학이 번성하자 불교가 다시 비판을 받다가 몽고가 세운 원나라가 라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그나마 존속하던 중국 불교가 큰 타격을 받았다. 명나라 때 잠깐 부활했지만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라마교를 국교로 삼으면서 중국 불교는 또다시 비운을 맞았다.
중국 불교유적 순례에 앞서 중국 불교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중국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고, 어떻게 발전했는지 간단히 살펴보았다. 
헝가리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한 마크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이라는 탐험가가 있었다. 그는 원나라 때 중국을 왔다 간 여행기를 쓴 마르코 폴로와 당나라 때 인도로 불경을 연구하러 간 현장스님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삼았다. 1900년 인도를 출발하여 실크로드 탐험길에 나섰다. 그는 그 길에서 자신의 마음 속 성자인 현장스님의 발자취를 찾고 싶었다. 이 스타인의 실크로드 탐험은 이후 서양 여러 나라와 일본에까지 알려져 수많은 탐험대들이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에 있는 불교 유적들이 찾기 시작하였다. 자국의 박물관과 연구자들에게 그들은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 연구자이자 선구자였지만 중국에게는 자신들의 유적을 파괴하고 약탈한 악마들이었다. 어쩌면 오늘날 무분별한 개발과 무관심으로 보호의 손길을 받지 못하고 사라지는 유적들이나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원래 모습과 완전히 다르게 색칠하거나 보수하는 것도 실크로드의 악마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음 회부터는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 만들어진 불교 유물과 유적지를 시대 순으로 순례하며 그 당시의 불교 정신과 불교 미술의 아름다움을 살펴보겠다. 현장스님이 불경을 찾아 인도에 갔던 마음으로 중국불교유적을 순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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