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 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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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 사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1.22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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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2)
북위 460년대에 만들어진 산시성 다퉁시에 있는 윈강석굴 제20굴
북위 460년대에 만들어진 산시성 다퉁시에 있는 윈강석굴 제20굴

 

인도에서 만들어진 종교인 불교가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과 한국, 일본으로 전래되었다. 그 과정에 불상 등 불교 관련 문화도 함께 전해졌다. 안타깝게도 전래 초기의 불상이 어떠한 모습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하지만 중국에 전해진 불교가 인도 북부 지역인 간다라 지역, 지금의 파키스탄에서 발전된 대승불교였다는 점에서 전래 초기의 불상 모습은 간다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불상이나 인도와 중국 중간 지역에 있었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예배할 때 사용된 불상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한 불상은 불교를 포교하려는 승려나 여행객들의 행장에 넣어 가지고 온 것이므로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만들어진 연대가 알려진 불상 중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338

▲간다라 불상 2-3세기
▲간다라 불상 2-3세기

년에 만들어진 작은 금동불좌상(높이 39.4cm, 후조 건무 4년, 샌프란시스코 동양미술박물관 소장)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간다라나 중앙아시아 불상을 모델로 하여 중국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불상도 이 불상이 만들어진 것과 비슷한 방식을 통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는 5세기 초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뚝섬에서 발견된 불좌상이 있다. 1959년 당시 뚝섬에 있던 교도소에서 한 수인이 작업하던 중에 발견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5cm 정도의 작고 마모가 심한 불상이다. 고개를 조금 아래로 숙인 채 양손을 아랫배에 모은 참선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고, 목을 둥글게 감싸고 U자형 주름이 반복되는 옷을 걸친 모습이다. 대좌 양쪽에는 마모되어 형상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입을 벌리고 양 발을 앞으로 내민 사자가 표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5세기에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구려 벽화 무덤인 장천 1호분에 그려진 불상의 모습과도 유사하다. 크기가 아주 작고 불상의 상태가 좋지 않으며 제작지도 중국인지 한국인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338년에 제작된 중국 불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학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인도의 간다라 지역에서 만들어진 불상 전통이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338년 중국에서 만들어   진 금동불좌상
▲338년 중국에서 만들어 진 금동불좌상

우리나라에서는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상황이나 처음 전래된 불상이 어떤 모습인지 확인할 수 있는 유물이나 유적이 거의 없는 실정이다. 반면 중국에서는 워낙 땅이 넓고 인구가 많다보니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유물과 유적이 전하고 있다. 물론 아주 초기의 불상이나 불교 유적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많지 않지만 어느 정도 발전한 이후에 만들어진 불교 유물은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일어난 폐불 시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이 남아있다.  
터키 계통의 선비족의 한 가지인 탁발씨가 세운 북위의 통치자들은 정복지를 수월하게 통치하기 위해 불교, 도교, 유교 등의 기존 종교를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특히 446년 태무제(423-452)는 도교를 국교로 삼는 한편 정치 원리로 유교를 받아들임으로써 외래 종교인 불교를 철저하게 탄압하였다. 그 과정에 많은 승려들이 죽임을 당했고 사원은 불살라졌고 경전과 불상이 파괴되었다. 폐불을 주도한 이들에게 불교는 외국에서 들어온 종교이고 억압해야하는 대상이었다. 이러한 폐불을 주도한 주요 인물과 태무제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불교는 다시 재기하게 되었다. 불교를 통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 주도한 왕은 태무제의 손자인 문성제(452-465)이다. 그는 불교 부흥을 국가적 사업으로 삼고 전폭적으로 지원했는데 이때 큰 역할을 한 이가 승려 담요(曇曜)이다. 담요는 원래 북량의 승려였으나 태무제가 북량을 정

▲5세기 초 한국에서 만들   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뚝   섬 출토 불좌상
▲5세기 초 한국에서 만들 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뚝 섬 출토 불좌상

복하자 북위의 수도인 평성으로 이주해 활동하였다. 그는 문성제 때 사문통이 되어 불교 교단이 탄탄하게 자리 잡도록 제도를 정비하고, 윈강석굴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문성제는 할아버지에 의해 벌어진 폐불에 대한 속죄의 의미로 담요에게 윈강에 있는 절벽을 깎아서 석굴사원과 거대한 불상을 만들게 한 것이다. 담요가 만든 것은 담요 5굴이라 불리는 윈강석굴 서쪽에 자리한 제16동에서 20동까지의 다섯 굴이다.    
이 윈강석굴의 조성은 황실 자체의 영광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중국 불교사에서도 기념비적인 사업이었다. 제 20굴의 경우 높이 15미터의 거대한 불좌상으로 신체 하부는 홍수 등 자연 재해로 인해 마모가 많이 되었지만 상부는 대체로 잘 남아있다. 당당한 어깨와 가슴은 불상 전체와 비례가 잘 맞으며, 얼굴에서는 아직 완전히 중국화 되지 않았음을 알려주듯 이국적인 요소가 조금 남아있다. 뒤에 사각형의 구멍들은 들보 같은 나무를 끼웠던 흔적이다. 지금은 불상이 완전히 노출되었지만 원래는 앞에 여러 층으로 이루어진 목조 건물이 있어서 불상을 보호하였다. 불상에는 채색한 흔적이 남아있으며 불상 뒷면의 광배와 그 주변은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되었다. 이 20굴에서 15굴까지의 다섯 굴은 문성제와 그의 4대조 조상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는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만든 후 6대조를 찬양하는 용비어천가를 만든 것과 비슷한 경우라 생각할 수 있다. 이 다섯 굴은 이후에 만들어진 많은 윈강석굴사원이나 5세기 후반 수도를 낙양으로 옮긴 후 조성된 룽먼석굴(龍門石窟)에 나타나는 중국화 된 불상의 시발점이라는 데 큰 의의가 있다.  

윈강석굴 전경
윈강석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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