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사원(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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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 윈강석굴(雲岡石窟)사원(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2.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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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4)
11굴 남벽의 이불병좌상. 얼굴과 신체가 길고 마르게 표현되었다
11굴 남벽의 이불병좌상. 얼굴과 신체가 길고 마르게 표현되었다

 

중국 한족의 입장에서 볼 때 오랑캐인 선비족 탁발부는 조조가 세운 위나라에 조공을 바쳤었다. 이후 삼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는 북방을 안정시키기 위해 탁발부에게 지금의 산시성 북쪽의 땅을 주어 살게 했다. 탁발부는 그곳에서 세력을 길렀고, 315년 탁발부 족장은 진나라로부터 대(代)나라 왕으로 봉해졌다. 대나라는 376년 탁발십익건이 왕일 때 전진(前秦)의 왕 부견(符堅)과의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이때 부견은『삼국사기』에 고구려에 승려 순도(順道)와 함께 불상과 불경을 보냈다는 바로 그 왕이다. 전진 왕 부견은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대나라 외에 동쪽의 전연(前燕), 남쪽의 양(梁), 서쪽의 전량(前涼) 등을 멸망시켜 376년에는 황하 북쪽인 화북 지방을 통일한다. 부견은 다른 민족의 인재들도 고루 등용하는 융합 정책을 폈다. 북중국을 통일한 부견에게 남은 것은 남쪽의 동진(東晋)만 정벌하여 천하통일을 완성하는 것뿐이었다. 한족 출신 재상 왕맹(王猛)을 비롯한 많은 대신과 부하들이 반대하였지만 이민족으로서 중국을 통일시키고자 하는 부견의 열망이 더 컸다. 결국 383년 90만에 가까운 원정대를 이끌고 동진 정벌을 감행하였다. 군사력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열세였던 동진은 비수(淝水)를 사이에 두고 전진군과 대치하였다.

대칭굴인 윈강 9, 10굴 전경. 한족의 무덤처럼 전실과 후실로 나뉘어졌다.
대칭굴인 윈강 9, 10굴 전경. 한족의 무덤처럼 전실과 후실로 나뉘어졌다.

 

전진군은 오랜 원정으로 피로에 쌓였고, 전진에 속한 한족 병사들은 자신들로 인해 한족 왕조가 멸망하는 것을 원치 않는 상황이었다. 그떼 전진의 대군이 모두 비수에 집결하지 않은 상황에서 군사력이 열세였던 동진이 먼저 기습하였다. 이 기습에 진용이 흐트러진 전진의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몇몇 장군이 죽으면서 퇴각하기 시작하자 동진군이 파죽지세로 전진군을 쫓았다. 결국 부견도 부상을 당한 채 화북으로 후퇴하였다. 동진이 10배에 가까운 전진의 대군을 물리친 이 비수대전은 삼국지의 적벽대전 등과 함께 소수의 군대로 다수의 군대를 물리친 대표적인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이 비수대전에서 참패한 전진은 그 세력이 점점 약해졌고, 부견에게 굴복했던 선비족 모용수, 모용충은 후연(後燕), 서연(西燕)을 건국한다. 이때 세워진 후연은 고구려와 요동 지역을 둘러싸고 대립하다 광개토대왕이 정벌한 그 나라다.

윈강11굴 남벽의 이불병좌상과 미륵보살상
윈강11굴 남벽의 이불병좌상과 미륵보살상

그리고 요장은 후진(後秦)을 세웠고, 부견에게 멸망한 대나라도 탁발십익건의 손자인 탁발규가 386년에 다시 세웠고, 나라 이름을 위(魏)라고 고쳤다. 이 위나라는 조조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북위라 불리는데, 초대 황제인 도무제는 후연, 북량 등을 공략한 후 398년에 수도를 평성(平城), 지금의 다퉁으로 옮긴다. 그 뒤를 이은 명원제, 태무제 때 북연, 북량을 멸망시켜 439년에 마침내 화북을 통일한다. 이때부터 중국의 북쪽은 이민족 왕조인 북위, 동위, 서위, 북제(北齊), 북주(北周)로 이어지고, 남중국은 한족 왕조인 송(宋), 제(齊), 양(梁), 진(陣)으로 이어지는 남북조 시대로 시작된다.  
북위는 다퉁으로 수도를 옮긴 후 기사굴산(耆闍堀山)과 수미산의 이름을 딴 전각을 세웠다고 전한다. 기사굴산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법화경을 설법한 영축산이고, 수미산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그 위에는 도솔천이 있다고 한다. 따라서 이들 전각에 모셔진 불상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중심이었을 것이다. 황실에서 후원한 이들 전각이 후에 만들어진 윈강석굴처럼 화려하게 장식되었다면 기사굴산전에는 법화경〈견보탑품〉에 등장하는 석가모니불과 다보불이 한 자리에 함께 앉은 이불병좌상도 모셔졌을 것이다. 그리고 수미산전에는 도솔천의 상황을 표현한 불상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도솔천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보살일 당시에 머무르면서 지상으로 내려갈 때를 기다렸던 곳이자, 내원궁에서 미륵보살이 지상으로 내려갈 시기를 기다리는 곳이다. 따라서 불당에는 현세에 오셨던 부처님인 석가모니 부처님 외에 미륵보살도 함께 모셔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이불병좌상과 미륵상이 윈강석굴 곳곳에 많이 조각된 것은 아마도 당시 유행한 불교관과 함께 이 기사굴산전과 수미산전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윈강 10굴 입구 위쪽에 조각된 수미산도
윈강 10굴 입구 위쪽에 조각된 수미산도

 

10굴 입구 위쪽에는 수미산이 조각되었는데 두 마리의 용이 산을 받고 있고, 산 속에는 사슴 등 동물들이 표현되었다. 아마 수미산전을 만들 때 북위 사람들에게 인식된 수미산의 모습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 때 만들어진 금동백제대향로와도 비교되어 흥미롭다.
기사굴산, 수미산과 관련된 불상들을 윈강석굴 곳곳에서 찾을 수 잇는데 11굴 남벽 2층 서벽의 불감군에 조각된 것도 그 한 예이다. 이불병좌상과 미륵상이 상하로 나란히 배치되었다. 아래에는 법화경에 나오는 석가모니불과 다보불, 위에는 도솔천에서 하생을 기다리는 미륵보살일 것으로 추정된다. 같은 굴 남벽의 이불병좌상에 비하면 살집이 있는 통통한 모습을 하고 있다. 

7굴 후실 천정의 비천상
7굴 후실 천정의 비천상

 

북위 제 7대 황제인 고조 효문제와 풍태후를 위해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대칭하는 쌍굴인 7, 8굴과 9, 10굴에서는 당시 한족의 풍습과 언어를 따르려는 한화 정책이 굴 조성에도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이 대칭굴들은 한족의 무덤 구조와 마찬가지로 전실과 후실로 나뉘어졌고, 윈강석굴 초기에 만들어진 투박하면서 강건한 느낌의 담요 5굴(제 16-20굴)의 불상들과 달리 한족인 남조 귀족들처럼 조금 마른 체형에 여유 있는 옷을 입은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굴의 천정에는 대개 커다란 연꽃과 연꽃 주변에 서 춤을 추듯 나는 천인들의 모습이 조각된다. 사진의 예는 10굴 남벽에 있는 빛이 들어오는 창의 천정에 조각된 비천상과 7굴에 있는 비천상의 모습이다. 7굴 비천상에서는 통통한 살집이 잡힌 얼굴과 신체에 부드럽게 꺾인 다리 표현이 마치 자연스럽게 수영하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은은한 녹색과 적색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부드러운 느낌을 더욱 배가시켜준다. 

10굴 남벽 창문의 천정에 조각된 연꽃과 비천상
10굴 남벽 창문의 천정에 조각된 연꽃과 비천상

 

유목을 생업으로 했던 북방 부족인 선비족은 북위 왕조를 세우고 농업을 생업으로 삼고 한화 정책을 추진한다. 윈강석굴은 그 과정에 만들어진 것으로 북위가 수도를 낙양(뤄양)으로 옮기기 전인 아직 완전히 한화되기 전의 모습이 반영된 불상들을 볼 수 있다. 수도를 낙양(뤄양)으로 옮긴 후 만든 룽먼(龍門)석굴의 불상들과 비교해 볼 수 있다. 중국 불교 유적 순례를 한다면 윈강과 룽먼석굴을 함께 보길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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