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自他不二의 아름다운 성장을 돕는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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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 自他不二의 아름다운 성장을 돕는 불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2.2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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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법담 _ 재가불자, 수필가

우리는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고 부르는 관념적 관점을 사수한다. ‘행복’의 명확한 정의가 불명확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이것을 추구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불교에서는 ‘자유’와 ‘기쁨’을 ‘행복’과 비슷한 의미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행복이 ‘무엇’을 ‘어떻게’ ‘보고’ ‘느끼는가’에 의해 대부분 결정되기 때문에 마음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자유를 희구한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과 눈을 가리고 빼앗는 것이 적을수록 더욱 행복에 가까워진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자유를 어떻게 확장하고 개발하고 성장시켜 나갈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자기 안에 갇혀서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골몰하는 것은 그릇되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즉 나와 남, 인간과 자연, 우주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이를 다른 말로하면 아집과 아상에서 벗어나 무아를 지향하는 깊고 넓은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을 벗어나 광활한 대자연 한가운데서 자유와 연대, 분리가 아니라 통합적 유대를 함께 누리는 것이 진정한 자유이며 기쁨의 창조를 위한 전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를 보면 대다수의 권력자들은 이러한 자유와 기쁨을 억제하는 것에 권력을 행사해왔다. 말로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고 하지만, 사실 권력의 속성은 백성들의 행복한 삶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무지렁이처럼 취급하며 연명할 정도의 우민화정책을 잘하는 것이 과거 권력자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백성이 대자유인이 되면 권력자는 그만큼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 자유와 기쁨을 위한 성장과 발전이라고 믿는 ‘기회균등’이라는 눈가림으로 경쟁과 이익의 극대화를 부추기는 난개발에 몰두하게 만든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사회는 보다 많은 소유를 위해 만인의 투쟁을 경쟁시켜 자타불이가 아니라 철저히 타인을 딛고 일어서서 이익을 극대화하게끔 만들며 ‘경쟁’에서의 승리를 ‘능력’이라고 믿게 만든다.  그 사이에 대중들은 서로를 향한 아귀다툼으로 갈등과 분쟁을 하면서 고단한 투쟁이 인생이라고 자포자기하며 끝없이 그칠 수 없는 충돌로 달려간다.
물질적 발전은 인류역사의 필연이었다. 오늘날 인류가 이룬 과학기술의 성과와 생활의 편리성, 대량소비사회가 주는 산업화의 풍요는 물질적 행복을 위한 인류의 꿈을 어느 정도 실현하는 듯 해 보인다. 그러나 부작용 역시 이에 못지않게 사회적 문제로 양산되고 있다. 갈등과 파국이 지속되는 한 과연 이 문명이 제대로 된 것인지 회의가 계속 머리를 드는 것은 이때문이다.  
인간은 아름다움과 기쁨의 행복을 추구한다.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자유와 창조, 상호관계의 행복 속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이 가능하도록 사회와 제도가 뒷받침하고 정치와 문화가 그 행복을 극대화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간단치 않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저성장, 저고용, 저투자의 침체를 겪고 있다. 선진국 사람들도 태반이 먹고 사는 일조차 힘든 생존 위기를 느끼고 있다. 과거의 자본주의 성공신화는 이제 무용지물이다. 기술혁신도 한계에 다다랐고, 혁신적 기술도 다중의 구매력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 
이제는 공존이 화두다. 타자의 존속을 전제로 한 그동안의 성장개발은 한계에 이르렀다. 동반자로서 타자와 다른 생물과 자연과 우주를 인식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계속적으로 타자의 희생위에 그 무엇인가 탑을 쌓으려 한다면 이제는 그 프레임이 적절치 않은 시대라는 뜻이다. 
인류가 처음 공동체의 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은 호혜적 증여의식과 무주상 보시의 순수한 도움이 전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사회적 윤리적 공감적 유대가 있었다. 즉 서로가 서로에게 순수한 증여를 하는 무주상 증여, 즉 불교적으로 무유정법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한 공감대 속에서 협업과 분업이 시작된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도 본래는 상호적인 교환과 증여의 순수한 공생이 기반이었다. 그러나 점차 사회제도적 경쟁속에서 사회적 신뢰도가 사라지고 상호주의는 개인과 집단의 이기주의로 굳어져 과거로 돌아가기란 거의 불가능하게 멀리 와버렸다. 사회주의가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겠다고 매우 폭력적인 방법으로 여러 시도를 해보았으나 결국 비인간화와 비효율적 자가당착에 빠졌고, 이를 극복하려고 하면 할수록 전체주의로 흘러가고 말았다.   
다른 대안으로 협동조합 운동과 사회적기업운동, 그리고 기본소득보장제 등이 호응을 얻기는 했지만, 이러한 방식도 결국에는 사회적 통제 강화와 강력한 정부 구축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경쟁일변도인 그동안의 자유시장 경제의 존치는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문제를 안고가자는 것뿐이 안된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먹잇감을 독점하고 쟁탈하는 동물의 생리적 법칙과는 달리 평화공존과 조화를 미학과 문화적으로 조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양극화의 심화, 독과점, 불로소득자의 과도한 성장이라는 경제동물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무한경쟁의 질주를 멈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삶, 서로를 잡아먹는 것이 아닌 서로의 행복을 위한 자타불이식 인간다운 자유경쟁을 추구하려는 본능이 인류에게는 있어왔다. 상호의무와 책임, 그리고 사회적으로 존중받고 싶어하는 욕구가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동력이라고 믿는 것이다. 
공공적 가치란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통해 기쁨의 창조와 슬픔의 나눔을 통해 미적 공감과 인간적 유대를 통해 공적 가치를 구축하는 사회일 것이다. 공적 가치란 야생이나 자연회복에 기여하는 일을 존중하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배려와 친절, 봉사의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인센티브를 주는 사회일 것이다.        
이러한 공적 행복은, 인간과 사회, 국가와 국가 간의 화쟁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자비와 호혜, 순수한 증여(보시), 연기법의 적용, 불이중도의 큰마음, 공과 무의 날카롭지 않은 편안한 상호존중, 아름다움에 대한 무의식의 공동적 조화 등등의 불교적 사유가 새로운 프레임으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의식과 정신이 제도에 대해 목적가치를 제시하여, 상처입고 병들어 고통에 빠진 이 사회의 치유에 넥타르가 되어야 한다. 부의 격차와 소득양극화, 경제불안과 저성장시대에는 경쟁적 독과점적 이기주의로는 서로가 자멸하는 길이다. 이러한 경고를 무시한 채 엔진오일이 말라버린 채 무한 질주하는 우리 사회는 조만간 퍼지게 되어있다. 
불교적 사유는 밖에서 구원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치유의 힘이 있다. 공익과 공공의 행복을 위해서 개인과 전체가 함께 행복하려는 사회이치가 사회과학과 사회구조적인 차원에서 해답을 얻지는 못했다. 자기책임주의, 유심주의라는 비판이 불교계에 제기된 그간의 잘못 제기된 오명을 딛고 공존과 조화에 기여하는 화쟁주의, 인간의 얼굴을 한 공동체 미학적 경쟁의 시대가 열리기를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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