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 10주기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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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10주기 - 버리고 비우는 일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3.0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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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의 10주기를 맞아 스님의 향기를 담은 글을 소개한다. 이 글은 수필집<무소유>에 실린 것으로 종교적 고정관념에 대하여 잔잔한 소감을 적은 글과 자연이 관광지화되어 수행처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적은 글이다. / 편집자 주 

 

그릇된 고정관념

대개의 경우 어떤 종교를 통해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갖지 않은 일반인들에 대해 대인관계에 있어서 너그럽다고 한다. 그러나 그 대인관계에 이교도로 향하게 될 때 돌연변이를 일으키는 수가 더러 있다. 너그러웠던 아량이 갑자기 움츠러들어 고슴도치처럼 가시를 돋우는 것이다.
나는 가끔 이런 대접을 받는다. 물건을 사기 위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가게 주인은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는 예수를 믿습니다.” 라고 한다. 물론 얻으려 온 탁발승으로 오인하고 한 말일 것이다. 태연하게 물건을 골라 돈을 치르고 나오면서 돌아보면 복잡한 표정이다. 혹은 기독교인들끼리 산사에서 놀러 와 어쩌다 찬송가라도 부를라치면 기를 쓰고 제지하는 산승들이 또한 없지 않다.
이와 같은 씁쓸한 현상은 어디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자기가 믿고 있는 종교적인 신념에서라기보다, 이교도라면 무조건 적대시 하려 드는 배타적인 감정에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자기가 믿는 종교만이 유일한 것이고 그밖에 다른 종교는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미신으로 착각하고 있는 맹목에서일 것이다. 이렇듯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선민의식이 마치 자기의 신심을 두텁게 하는 일인 양 알고 있기때문에 스스로의 시야를 가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단견들이 읽는 경전이나 성경의 해석 또한 지극히 위태로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말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인 언어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종교가 존재하고 있는 한 어떤 종교이고간에 그 나름의 독자적인 상징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상징이 맹목적인 숭배물로 되거나 혹은 다른 종교에 대해 우월을 증명하는 도구로 쓰인다면 그것은 무의미하다.
모든 오해는 이해 이전의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판은 올바른 인식을 통해서만 내려 질 수 있다. 그런데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일부 종교인들은 성급하게도 의식을 거치지 않고 비판부터 하려 든다. 물론 인식이 없는 비판이란 건전한 비판정신일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이 진정으로 자기 종교의 본질을 알게 된다면 자연 타종교의 본질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전까지 기독교도와 불교도 사이에 바람직한 대화의 길이 트이지 못한 그 원인을 찾는다면, 상호간에 독선적인 아집으로 인한 오해에 있었을 것이다. 출세간적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필자가 즐겨 읽는 (요한의 첫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부처님”으로 바꿔놓으면 사이비 불교도들에게 해당될 적절한 말씀이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다. 오늘날 만약 예수님과 부처님이 자리를 같이한다면 어떻게 될끼? 그릇된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으르렁대는 사이비 신자들과는 그 촌수가 다를 것이다. 모르긴 해도 의기가 상통한 그들은 구태여 입을 벌려 수인사를 나눌 것도 없이 서로가 잔잔한 미소로써 대할 것만 같다. 그들의 시야는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은 하나로 맺어져 있을 것이기 때문에. (1973년)

영달한 산

법정스님은 출세간적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종교간 벽은 단지 그릇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법정스님은 출세간적인 사랑은 편애가 아니고 보편적인 것이며, 보편적인 사랑은 이교도를 포함한 모든 이웃에 미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종교간 벽은 단지 그릇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것이다.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산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다면, 속 모르는 남들은 웃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산승들은 누구보다도 산으로 내닫는 진한 향수를 지닌다. 이 산에 살면서 지나온 저 산을 그리거나 말만 듣고 아직 가보지 못한 그 산을 생각하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산을 “육지의 표면이 주위의 땅보다 훨씬 높이 솟은 부분”이라고 풀이한다. 이러한 산의 개념을 보고 우리는 미소를 짓는다. 그것은 형식논리학의 답안지에나 씀직한 표정이 없는 추상적인 산이기 때문.
산에는 높이 솟은 봉우리만이 아니라 깊은 골짜기도 있다. 나무와 바위와 시냇물과 온갖 새들이며 짐승, 안개, 구름, 바람, 산울림 그리고 퇴락해가는 고사, 이 밖에도 무수한 것들이 우리들의 상념과 한데 어울려 하나의 산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산이 좋아 산에서 산다는 말이 있지만 그건 거짓이 아니다. 산이 싫어지면 산에서 살 수가 없다. 그러니 한 번 산에 들어 살게 되면 그 산을 선뜻 떠나올 수 없는 애착이 생긴다.
산은 사철을 두고 늘 새롭다. 그 중에도 여름이 지나간 가을철 산은 영원한 머시마인 우리들을 설레게 한다. 물든 잎이, 머루와 다래와 으름이 숲에서 손짓을 하고 있다. 그래서 일과가 끝나는 가을날 오후에는 선원이고 강원이고 절 안이 텅 빈다. 다들 숲에 들어가 산짐승처럼 덩굴에 매달리기 때문이다.
우수수 꿀밤이 떨어진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뭐라 지껄이는 소리들이 귀에 익은 음성처럼 그토록 정답게 들려올 수가 없다. 이런 일들로 해서 산에서 사는 사람들한테서는 풋풋한 냄새가 난다.
예전 수도승들은 살던 산이 단조로워지면 도반들 곁을 떠나 더욱 깊은 산을 찾아 홀로 나섰다. 벼랑아래 삼간 초막을 짓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자연을 벗삼아 도심을 닦았다.

흰구름 무더기 속에 삼간 초막이 있어
앉고 눕고 거닐기에 저절로 한가롭다
차가운 시냇물은 반야를 노래하고
맑은 바람 달과 어울려 온몸에 차다.

이런 경지에 고려말 나옹선사뿐 아니라 산을 알고 도를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출세간의 멋이다. 깊은 산이라 온종일 사람 그림자 끊이고 홀로 초막에 앉아 만사를 쉬어버린 것이다. 서너 자 높이의 홀로 초막에 앉아 만사를 쉬어버린 것이다. 서너 자 높이의 사립을 반쯤 밀어 닫아두고, 고단하면 자고 주리면 먹으면서 시름없이 지내는 것은 단순한 은둔을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시절인연이 오면 사자후를 토하기 위한 침묵의 수업인 것이다.
숲과 새들이 있고 감로천이며 연못이 있는 우리 다래헌이지만 무더운 여름날이면 문득문득 산 생각이 안다. 그때마다 시냇물 소리를 그리워하며 속으로 앓는다. 훌쩍 찾아갈 산이 없어  날개가 접히고 만다. 요즘의 산사에서는 그 풋풋한 산 냄새를 맡을 수가 없다. 관광 한국의 깃발 아래 그 그윽한 분위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이래서 뜻있는 수도승들은 명산 대찰을 등지고 이름없는 산야에 묻힌다. 도시의 공해로 인해 새들이 어디론가 사라져가듯. 안타까운 일이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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