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죽음을 왜 염(念)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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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죽음을 왜 염(念)하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3.04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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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이제 인간 수명 100세를 바라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공자는 100세가 되는 나이를 상수上壽라고 일컬었다. 우리는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
세존께서 가르치실 때 인간 수명은 100년이라 말씀하셨고 때로는 120세까지 산 사람의 이야기를 하신 적도 있다. 무병장수의 복락은 공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업을 쌓아야만 한다. 탐욕·성냄·어리석음과 같은 마음의 번뇌들이 줄어들어야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부처님은 80세에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에 드셨다. 보통 사람들은 그것을 천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저절로 생명유지의 기능이 멈춘 자연사로 여길 수도 있을 법하다. 
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하여『대반열반경』(D16)을 탐독했다. 태어남이 있을 때 죽음이 있다. 고대 인도의 아소카 대왕과 같은 전륜성왕에게도, 깨달음을 실현하시고 법을 선포하신 세존에게도 죽음이라는 현상은 필연적이다. 태어나지 않음[不生]이 있으면 죽음의 없음[不死]이 있다. 부처님은 3아승기겁 10만겁 동안 수행을 닦아 ‘해야 할 바를 다했기’에 비록 육신의 생명기능[命根]이 남아 있지만 “태어나지 않은, 조건 지어지지 않은 적멸”에 드신 것이다.
죽음이란 지수화풍이라는 사대의 작용이 바뀐 것을 말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매일매일, 순간순간 변화한다. 이 몸뚱이는 비록 사후에 지수화풍으로 분해되지만 생명의 흐름은 불변의 영혼으로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란 형태로 계속된다. 마치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 유전하듯 계속성은 있되 그 밖에 어떤 동일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에는 수명이 다하여 맞는 죽음과 불시의 죽음, 두 가지가 있다. 전쟁이나 불의의 교통사고, 또는 14세기의 유럽의 ‘흑사병’, 최근의 신종독감과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과 같은 전염병에 의한 죽음은 후자에 속한다.
마치 버섯의 싹이 반드시 머리에 포자를 띠고 나는 것처럼 중생도 반드시 늙음과 죽음을 갖고 태어난다. 재생연결을 생기게 한 업의 과보가 익었기 때문에 맞는 죽음은 전자에 속한다. 
때가 된 죽음을 억념憶念(sati)하는 것을 죽음에 대한 명상[死念]이라 한다. 고희를 넘기고 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염두에 두게 된 까닭은 정근正勤의 힘을 키우기 위함이다. 무상을 알아차리는 생각의 수풀이 형성되고 뒤이어 고苦와 무아에 대한 인식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옛날 영취산의 집회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니, 모두 잠잠히 말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 존자만이 활짝 얼굴을 펴고 살며시 웃었다. 『선종 무문관』공안 제6칙 ‘세존염화世尊拈花’에 실린 화두이다.
가섭 존자가 왜 미소 지었는지는 여전히 격외소식이다. 수행자들은 꽃을 통해 조건으로 생겨난 형태들의 무상함을 본다. 아름다움과 시듦의 본질을 본다. 꽃의 그러함, 즉 공성空性을 본다. 모든 가르침이 그 꽃 안에 담겨있음이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는 슬픔이, 원수의 죽음에는 후련함이, 무관한 사람의 죽음에는 화장터의 화부 같은 무덤덤함이, 자신의 죽음에는 두려움이 생겨날 수 있다. 이렇게 느끼면서도 그 무상함에 사무치면 느낌의 노예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죽음에 대한 명상의 지침은 붓다고사 스님의『청정도론』8장에 나온다. 요약하면 이렇다. “조용한 장소에서 정좌靜坐한 후 ‘죽음이 올 것이다, 생명이 끊어질 것이다’, 또는 ‘죽음, 죽음’이라고 새기면서 빈틈없이 주의를 집중해야 한다.”
내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익지 않은 과일을 흔들어 떨어뜨리려 하지도 않고 익어 저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며 법에 의지하여 머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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