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 전통의 불상 양식의 탄생지 - 마투라(Mathu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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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전통의 불상 양식의 탄생지 - 마투라(Mathura)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3.11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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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하(여행작가)
크리슈나만디르사원의 프론트에 조각된 크리슈나와 그의 부인 라다
크리슈나만디르사원의 프론트에 조각된 크리슈나와 그의 부인 라다

 

크리슈나의 고향 마투라
마투라는 힌두교에서 크리슈나의 고향이지만, 불교미술의 발상지로서 중요한 역사적 위치를 차지하는 곳이다. 마투라는 델리에서 140여km 떨어진 곳으로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부처님 재세시에도 이곳을 방문한 곳이지만 오래 머물지는 않았다. 그 이유로는 땅이 평탄하지 않고, 먼지가 많았으며, 짐승들의 위협과 약샤(=야차(夜叉))들이 잔인하고, 탁발의 어려움으로 인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고 아함경에 전한다. 

마투라는 2세기에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의 본거지였다. 크리슈나 신(神)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어 힌두교의 중요한 성지이며, 야무나강을 따라서 사원과 가트가 줄지어 있다.
마투라는 2세기에 불교도와 자이나교도들의 본거지였다. 크리슈나 신(神)이 태어난 곳으로 알려져 있어 힌두교의 중요한 성지이며, 야무나강을 따라서 사원과 가트가 줄지어 있다.

 

잡아함경에 의하면 부처님 제자 마하카타야나도 얼마동안 군다바나(Gundavana) 사(寺)에 머물렀는데, 그곳에서 마투라의 국왕 아반티푸트라(Avantiputra)가 찾아와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대해 질문을 하였다고 한다. 마투라의 왕은 “브라만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제일이요 다른 종성은 낮고 열등하다. 우리는 희고 다른 종성은 검다. 브라만은 청정하고 브라만이 아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우리들은 브라만(=우주질서인 근본 원리로서의 브라만을 뜻함)의 아들로서 브라만의 입에서 태어났고 브라만이 변화한 것이다. 우리들은 브라만에 속한 존재이다’라고 말합니다. 존자 마하카타야나시여, 이 뜻은 어떠한 것입니까?”라고 질문하자, “대왕이여, 그것은 세상에서 하는 말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업에 의한 것입니다. 브라만이나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 등 이 네 종류의 사람들은 다 평등한데, 무슨 차별이 있겠습니까? 만일 브라만이 살생·도둑질·삿된 음행·거짓말·욕설·이간하는 말, 꾸밈말, 탐냄, 성냄, 삿된 견해 등, 열 가지 좋지 않은 업을 짓는다면 나쁜 세계에 태어나겠습니까, 좋은 세계에 태어나겠습니까? 브라만이라도 열 가지 좋지 않은 업을 지으면 반드시 나쁜 세계에 떨어질 것입니다. 만일 브라만이 열 가지 좋은 업을 행한다면, 그는 반드시 좋은 세계에 태어날 것입니다. 이는 크샤트리아나 바이샤, 수드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치가 그와 같다면 곧 평등해서, 갖가지의 낫고 못한 차별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마투라왕은 기뻐하면서 예배하고 떠나갔다고 전한다.
목갈리풋다티샤가 아소카왕을 도와 제3결집을 주재하기 위해 파탈리푸트라에 돌아간 것은 역시 아호강가의 은거지에서 7년의 은둔생활을 한 뒤였다. 

보살명불삼존비상. 적색 사암으로 조성, 높이 69.2cm, 2세기 전기, 마투라지역 카트라 출토, 마투라박물관 소장.
보살명불삼존비상. 적색 사암으로 조성, 높이 69.2cm, 2세기 전기, 마투라지역 카트라 출토, 마투라박물관 소장.

 

불상은 어디서 최초로 만들어졌을까?
불상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간다라지방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인도 북부에서 탄생한 마투라 양식의 불상이 있는데 학계에서는 간다라와 마투라 중 어디서 먼저 불상이 발현되었느냐를 두고 의견이 나뉘어진다. 그 이유가 간다라와 마투라 불상을 연대측정을 해봤더니 거의 시간차를 두지 않고 동시대에 출현했다는 연구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간다라에서 불상이 발현되어 인도 본토로 넘어왔다는 주장이 다수이다.
마투라의 초기 불상들은 부처님 사후 아직 불상 조성을 금기시하는 지역 전통이 잔재해 있었기 때문에 불상을 만들어놓고 보살상이라고 이름지어 놓았다, 그래서 마투라 지역에서 출토된 불상들을 보면 보살상이라고 이름 붙인 것들이 많다. 또한 인도 고유 미술의 영향을 받아서 양감이 풍부하며 상당히 관능적이다. 검푸른 편마암을 쓴 간다라 불상과는 달리 인도 지역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온화하고 밝은 이미지를 준다. 그리고 간다라와는 달리 눈을 크게 뜨고 웃고 있는 표정이 많다. 또한 불상이 입고 있는 법의도 나풀나풀한 인도 고유 복식이며 한 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편단 형식을 보인다. 

32년명불삼존비상. 적색 사암, 높이 72.5cm, 넓이 47cm, 159년, 마투라 인근 아히차트라 출토, 뉴델리국립박물관 소장.
32년명불삼존비상. 적색 사암, 높이 72.5cm, 넓이 47cm, 159년, 마투라 인근 아히차트라 출토, 뉴델리국립박물관 소장.

 

아소카대왕은 과거의 부처들을 기념하기 위해, 그리고 부처의 여러 위대한 제자들, 즉 샤리푸트라, 마후드갈랴야나, 푸르나마이트라야니푸트라, 우팔리, 아난다, 레베타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마투라에 3기의 스투파를 건립했다. 그러나 이 스투파들은 아무 것도 발견하지 못했고, 그 장소조차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마투라는 불교에 호의적이었던 왕들이 슝가 왕조 때와 샤까(Śaka)족의 점령기 동안 마투라를 통치했다. 그러나 이 도시가 불교의 보루들 가운데 하나가 된 것은 기원후 2세기, 쿠샨왕조 시대가 되어서였다. 마투라가 카슈미르의 설일체유부로부터 교훈적인 이야기를 전해 들은 것도 이 시기로 추정된다. 근본설일체뮤부의 비나야(율장)는 부처님이 생전에 북인도 여행을 했다는 허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도전통에서 유래한 마투라 불상
서기 1세기경 마투라는 서북 인도와 중인도의 교통 요로에 위치해 상업도시로 크게 성장했다. 그래서 이곳을 중심으로 더욱 진취적인 사상경향으로 대승사상이 정착하게 된다. 이 대승사상을 바탕으로 불전도에서 부처의 모습을 사람 형상으로 표현하지 않던 오랜 전통을 깨고 불상이 등장한다.
초기에는 많은 불전도 중에서 전통적인 상징물과 함께 부처가 되기 이전의 불타, 즉 보살수행시의 부처부터 인체 표현을 시도하는 것을 탑문(塔門) 장식의 부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점차 예배 대상으로서의 불상을 제작하기에 이르는데 이는 마투라 지역이 가지는 진취적인 기상과 상업적인 풍요로움이 예배상의 조성을 갈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여기에는 이 지방을 다스리는 절대권자인 태수 마하카샤파(mahāksatrapa)의 진보적이고 적극적인 종교정책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상이 처음 출현하는 1세기 말기에서 2세기 전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불상을 만들어 놓고도 그것을 불상이라 하지 못하였다. 카트라(Katrā) 출토 <보살명불삼존비상(菩薩銘佛三尊碑像)>의 대좌에 새겨진 명문에는 “붓다라키타(Buddharakhita)의 어머니 아모하아시(Amohā-āsī)는 자신의 절에 보살상을 만들어 모신다. 일체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보살명불삼존비상>은 대체로 마투라가 쿠샨왕조의 지배 아래 들어간 이후인 2세기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는데, 거의 동시대에 출현하는 간다라 불상과는 양식적으로 전혀 상이하다. 간다라 불상이 그리스 조형 전통에 기반을 둔 것이라면 이 마투라 불상은 순수한 인도적인 전통적 분위기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불상의 팔다리와 몸통을 과장되고 힘찬 모습이나 배꼽이 내비치는 얇은 옷의 표현은 아소카왕시대 이래의 야차신상(夜叉神像)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부처님은 항상 젊고 늙지 않는다는 생각에 입각하여 처음부터 불상을 소년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머리 모양도 성인식을 갓 치르고 난 동자의 머리인 주라(周羅) 나계(螺髻: 정수리의 머리칼만을 모아서 소라껍데기 모양으로 틀어 올리는 상투)형태를 하고 있으며, 얼굴은 수염 하나 나지 않은 동안으로 표현했다.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시원스러워 우람한 체구와 함께 섹시하기까지 한 매력을 풍기고 있는데 이는 옷주름이 없다면 나체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의복은 가사를 편단우견(偏袒右肩: 오른쪽 어깨 한쪽만 드러냄)의 옷 입는 법으로 표현되어 있고, 손바닥에는 윤보(輪寶)의 표시가 분명하고 눈썹 사이에 백호(白毫)가 있어 높은 상투와 함께 역시 경전에서 이야기되는 32상(相)의 기본 요건에 충실함을 보여 준다.
마투라의 불상들은 사실성을 토대로 하였지만 실제로는 이상주의적 혹은 관념적 성향이 강했다. 간다라불상들은 가장 이상적인 인체를 표현하였지만 사실성에서는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마투라 불상들은 발이나 손에 법륜을 새기고 관념성과 추상성을 가미했다. 당시 불상을 조성한 마투라 불자들은 부처가 해탈을 통해 사람에서 초인으로 되었다는 신격화된 믿음이 필요했고, 사람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백호나 발바닥의 법륜, 육계, 사자같은 몸 등을 하나의 불상 양식으로 조성한 것이다.  

 

이렇게 진보적인 대승사상과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인도 불상을 탄생시킨 마투라는 중인도에서 불상 조성의 성역이었다. 부근 시크리(Sikri)에서 산출되는 적색 사암이 불상 조각의 재료로 쓰기에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카니쉬카대왕의 성세를 지나서까지도 계속 마투라에서의 불상 조성은 활기를 띠어갔으니 가위 마투라는 불상시대 이후 중인도 불교미술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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