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2주년 특집 - 4.3희생 스님들의 해방정국에서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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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72주년 특집 - 4.3희생 스님들의 해방정국에서의 활동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4.08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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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금붕사 경내
4.3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금붕사 경내

 

제주불교계의 4·3 희생 스님들은 대부분 해방정국에서 적극적인 불교혁신과 단일민족국가수립을 위한 사회활동의 주역들이었다. 제주4·3사건으로 인한 스님들의 인명 피해는 모두 14개 사찰의 16명의 스님이다.  
이성봉 스님의 경우에는 금붕사 경내로 도망 온 마을청년을 숨겨주고 있었는데, 그 청년을 뒤따라온 토벌대가 청년의 행방을 물었으나 스님이 모른다고 하자 여덟 발의 총을 쏘아 사살당했다. 이성봉 스님은 본래 화엄사 제주포교소 포교사로 1937년에는 두 달에 걸친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마련하여 제주도 순회포교를 실시하였고, 1939년 ‘제주불교연맹’에서 검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또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으로 선정되기도 한 우리나라 불교사에서 대단히 혁신적인 활동가였다. 

이세진 스님
이세진 스님

신홍연 스님은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를 창건하신 분으로, 4·3당시 토벌대가 무자비하게 살육을 벌이자 함덕리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피해 절에 숨어서 몰래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수색에서 발각되어 신홍연 스님은 귤나무에 묶인 채 마을 청년들로 하여금 죽창으로 스님을 찌르게 하였다. 당시 곳곳에서는 토벌대가 산에서 잡혀온 사람들을 마을사람들, 심지어 부녀자에게도 죽창을 쥐어 주고 찌르게 하였다. 그렇게 희생된 신홍연 스님은 가부좌를 하고 염불을 하며 임종했는데, 가부좌 상태로 굳어 있어서 시신을 펼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을 상좌인 김두전 스님이 기도를 하자 몸을 풀어 매장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희생되신 스님들은 주로 불교혁신을 주도했거나 해방된 정국에서 자주적인 단일국가, 즉 분단을 반대하신 분들이 많았다.
백인수 스님는 용장사 승려로 1940년 백양사 김녕포교소 감원을 역임하기도 하였으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교무회원을 역임했고, ‘제주불교청년단’ 선전부장으로 추대된 분이다. 해방정국에서 적극적인 사회활동을 하였고, 민족문제에 매우 적극적이었으며, 신도들과 마을 주민들에게도 매우 신망받는 지식인이었다. 그런데 백인수 스님는 1949년 1월 6일 토벌대의 도평마을 집단 학살로 처참하게 희생되었다. 
이일선 스님은 1950년 예비검속되어 산지천 앞 바다에 수장되었다. 이일선 스님은 선운사에서 출가하여 백양사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다 1937년 백양사 포교사로 제주에 내려온 이후 제주에서 활동하였다. 1939년 ‘제주불교연맹’ 포교부장으로 전도 순회강연을 주도하였고,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 승려대회’의 준비위원장으로서 친일을 반성하여 왜색화 된 불교풍토를 정화하려는 노력을 주도하신 분이다. 
특히 이일선 스님은 4.3의 기폭제가 되는 1947년 ‘3․1절 기념 투쟁 제주도 위원회’ 선전동원부에서 활동하였고,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3인의 의장단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력이 있었는데도 1950년까지 활동하였던 것은 상좌인 김우송 스님이 헌병장교였기 때문에 이 김우송 스님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일선 스님은 강연과 선전선동 활동에 매우 탁월한 능력이 있었으며, 이론과 논리가 정연했고, 철저한 민족자주주의자로 분단을 반대하던 애국주의자였다.  일본으로 도피한 스님도 있었다. 고인봉 스님은 은수사 주지였는데,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서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장으로 추대되신 분이다. 그런데 1950년 앞서 이야기한 이일선 스님이 예비검속으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 일본으로 급거 피신하였고, 그후로는 일본에서 승려 생활을 하다가 그곳에서 입적했다. 

원문상 스님
원문상 스님

 

고문을 당하다 돌아가신 스님도 있었다. 수원사 주지셨던 고정선 스님이 그런 케이스로, 고정선 스님은 해방이 되자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의 교무회원을 했고,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1949년 4.3사건이 나자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당했는데, 당시 좌익 쪽 연락책이었다고 증언되는 고인봉 스님이 수원사에 기거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계속된 고문 끝에 고정선 스님이 제대로 불지 않는다고 총살시켜 버렸다. 
무장대 활동을 한 스님도 있었다. 이세진 스님이 대표적인데, 원래 이세진 스님은 내장사에서 출가하였다. 1932년 경성 개운사 불교 전문강원에서의 강연 기록이 남아있고 1937년 금강산 표훈사 중향강원의 강사를 했다. 그러다가 1939년 한림포교당 포교사로 부임하면서 제주도에서 처음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9년에는 ‘제주불교연맹’에서 교육부장으로서 학인을 교육하는 강사로 활동했고, 1942년에는 도평리에 서관음사를 창건하여 기와공장을 운영하며 강원설립을 계획하는 등으로 불교의 경제적 자립을 실천했다. 
그러다가 신도들과 마을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것을 보다못해 1948년 입산하여 무장대로 활동하게 된다. 이세진 스님은 무장대 지휘부였던 이덕구 등 15인의 지휘부와 함께 관음사에서 기거하며 활동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다가 1949년 초, 토벌대에 포로로 잡혀 제주시 동부두 주정공장에 잡혀있었는데, 이일선 스님의 상좌였던 헌병장교 김우송의 도움으로 목숨을 유지하였지만, 결국 1949년 7월 관음사에서 다시 잡혀가 산지 앞바다에 수장 당했다. 
또, 고제선 스님은 서관음사 승려로 이세진 스님의 상좌였다. 대각사 서기를 역임하였고 1945년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에 서관음사를 대표하여 참석하였는데, 토벌대가 서관음사를 불태우고 난 후에 행방불명되었다. 
예비검속으로 희생된 스님도 있었다. 원문상 스님과 이창현 스님이 그렇다. 원문상 스님은 기림사에서 출가하신 분으로 법화사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다 해방이 된 1945년에 ‘조선불교혁신 제주도승려대회’의 부의장으로 승려대회를 진행하였고 중앙교무회에 파견될 제주대의원으로 추대되신 분이다. 또 중문중학원을 설립하고 여기에서 역사와 국어, 한문을 가르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50년 7월 7일 서귀포 경찰서장 김호겸의 이름으로 제주도 경찰국장에게 보고한 문서인 ‘공무원 구속자 명부’에 의하면 원문상 스님은 2‧7사건의 주모자이고 좌익사상 극렬자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상황을 알고 있는 마을 주민의 증언으로는 서북청년단으로 내려온 전문규가 누명을 씌워 학교를 빼앗았고 그 이후 예비검속되어 섯알오름 집단학살에서 처형당했다고 증언했다.

4.3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관음사
4.3의 상흔이 곳곳에 남아있는 관음사

 

이창현 스님도 1950년 9월 4일 제주경찰서 예비검속자 명단에 있는데, 스님이 남로당원이라고 하고, 농위원이라는 것이 범죄의 개요로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범죄개요를 봤을 때 예비검속자들과 함께 희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오이화 스님는 관음사에서 출가하여 관음사 서기, 제주불교포교당 서기, 법화사와 불탑사 감원, 포교당 감원, 관음사 2대주지, 제주교구 교무원 재무국장, 조선불교 중앙대의원, 제주교구 교무원장, 1939년 제주불교연맹 활동을 주도하는 등 제주불교의 핵심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제주4․3 당시 무장대의 중심 활동무대로 활용되던 관음사의 당시 주지였다. 1949년 2월 관음사전투의 격전지로 토벌대와 무장대의 전투 결과 토벌대에 의해 관음사가 불태워졌는데, 당시 토벌대는 관음사 주지 오이화 스님를 마차에 묶어 고문을 하였다고 증언되고 있으며, 그 이듬해인 1950년 병을 앓다 입적했다. 
소개령에도 그냥 사찰을 지키다가 희생당한 스님들도 꽤 된다. 양홍기 스님은 원만암 주지로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단원이었는데, 소개령에도 절을 떠날 수 없어 홀로 절을 지키다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
강기규 스님는 단산사 승려였는데, 1945년 ‘제주도불교청년단’ 선전부원이었다. 양홍규 스님처럼 1948년 가을, 소개령에도 절을 지키다가 단산사 경내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했다.
김덕수 스님는 월정사 승려로 입산하여 무장대 활동을 하기도 하였는데, 1948년 11월 13일 월정사에서 잡혀나가 제주시 박성내에서 총살당했다.
북촌리 집단학살에서도 희생된 스님이 있었다. 김유신 스님은 북촌포교소 주지였는데, 북촌리 집단학살 당시인 1949년 1월 17일 마을주민 400여명과 함께 총살당했다. 북촌리 집단학살은 4.3으로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매우 잔인한 사건으로 기념관에서도 사건의 실상을 알아볼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해방 국면과 4.3에서 제주불교계는 적극적으로 참여한 만큼 제주불교의 피해 또한 막심했다. 제주불교를 이끌던 인명의 피해는 오래도록 그 후유증이 컸으며, 사찰 건물 등의 피해 또한 재건하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근대 이후 제주불교의 중심지였던 관음사는 관음사전투로 인해 인명의 피해와 사찰 건물의 전소로 인한 피해로 제주불교 활동의 전체적인 어려움을 증명하고 있다. 재건 과정 또한 1964년에 이르러서야 관음사의 재건이 시작되는 것으로 그 험로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불교계는 새로운 나라건설에 특히 관심이 많았는데, 그만큼 호국과 민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였고, 중생을 위한 불국토 건설에 적극적이었다. 제주불교는 해방으로 친일을 반성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에 맞춘 한국불교의 전통을 되살리고자 하는 활동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4․3으로 인해 단절되었다. 그러나 지금의 제주불교 전통은 4․3시기 치열한 스님들의 참여활동이 그 기반이 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정리: 안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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