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귀신[詩鬼], 이하(李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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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귀신[詩鬼], 이하(李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4.16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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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기자의 교양으로 읽는 漢詩 ②
그림) 요절한 천재시인 이하와 그의 시종. 그는 시를 지으면 뒤따르던 종아이[奚]가 맨 비단가방[囊]에 시를 넣어두게 하였다. 한시에서 해낭(奚囊)이라는 말은 이하 혹은 시, 시인을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그림) 요절한 천재시인 이하와 그의 시종. 그는 시를 지으면 뒤따르던 종아이[奚]가 맨 비단가방[囊]에 시를 넣어두게 하였다. 한시에서 해낭(奚囊)이라는 말은 이하 혹은 시, 시인을 총칭하는 말로 쓰인다.

 

저의 경우 학사논문을 시의 귀신, 이하(李賀)의 시로 제출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그 논문의 제목조차 깨끗이 잊었지만, 그래도 ‘유리 술잔에 호박빛 진한 술’로 시작하던 <장진주(將進酒)>라는 시는 당시에도 너무 좋아서 텅 빈 강의실에서 분필로 꾹꾹 눌러가며 수없이 베껴 써봤던 탓에 아직도 대충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유리 술잔에 호박빛 진한 술. 
작은 술통의 술 방울은 빨간 진주 같고 
용을 삶고 봉황을 구우니 
뚝뚝 기름이 떨어지는데 
비단 병풍 수놓은 장막에는 
향기로운 바람 감도네.
나는 악어로 만든 북을 두드릴 테니 
그대는 희고 깨끗한 이로 노래하며 
가는 허리로 춤추어 보시게.
하물며 이 푸른 봄도 장차 저물면 
복사꽃도 붉은 비처럼 져버릴 터. 
그대에게 권하니 종일 흠뻑 취하시게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를 수 없으리니. 

琉璃鍾  琥珀濃
小槽酒滴眞珠紅 
烹龍炮鳳玉脂泣
羅屛綉幕圍香風
擊鼉鼓 皓齒歌 細腰舞 
況是靑春日將暮 
桃花亂落如紅雨
勸君終日酩酊醉
酒不到劉伶墳上土

이하는 삶부터가 드라마틱한 인물입니다. 왕가(王家)의 후예이면서 두보의 먼 친척이기도 한 그는 일곱 살부터 글을 짓기 시작해,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한유(韓愈)의 격려를 받았습니다. 810년 진사(進士)가 되고자 장안으로 가서 과거에 응시했지만, 아버지의 휘(諱)였던 ‘진(晉)’과 진사의 ‘진(進)’이 같은 발음이라는 황당한 이유로 시험을 거부당합니다. 보다 못한 한유가 직접 나서 <휘를 변명하다>라는 글을 지어 그를 옹호했지만 통하지 않았습니다. 끝내 과거를 치를 수 없는 상황에 몰리자, 마치 쥐어짜듯 240여 편의 기괴한 시들을 쏟아놓고, 겨우 스물일곱이라는 나이에 요절해버린 시인입니다. 그가 즐겨지은 시의 형태는 악부(樂府)라는 것인데, 지금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노래가사입니다. 당시 그의 악부가 얼마니 인기가 있었던지 장안의 일류 기생들은 그의 노래에 열광했으며, 새로운 악부가 나오길 학수고대했다고 합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이하는 가장 잘 팔리는 이른바 대세의 작곡가였던 셈입니다. 
첫 번째 연은 흥청망청 거리는 술집의 풍경입니다. 두 번째 연은 그곳의 여인네들과 어울려 춤추고 노래하는 장면입니다. 세 번째 연은 오늘 왜 이렇게 마셔대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 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는 것이 우리네 삶이 아니겠는가, 그토록 술을 좋아했던 유영(劉伶)도 이제 더는 못 마시는 술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맨 마지막 구에 등장하는 유영이라는 인물은 죽림칠현 중 한사람이며, 술의 화신입니다. 그는 항상 삽 한 자루를 둘러 맨 시종을 데리고 다녔답니다. 자신이 술을 마시다가 자빠져 죽거든 그냥 그 자리에 삽으로 땅을 파 묻어 버리라고요. 술병을 들고 비척거리며 앞서 걷는 유영과 삽을 둘러매고 울면서 종종 걸음으로 주인의 뒤를 따르던 시종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면 우스꽝스럽기조차 합니다. 그래서 그를 묘사할 때는 보통 취사(醉死)라는 말을 씁니다. ‘취해서 죽자’ 혹은 ‘취해서 죽은 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그의 시의 가치를 알아본 이는 한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만당의 이상은, 그리고 피일휴 등이 그의 시를 이해해주기 시작했습니다. 남송(南宋) 말기에서 원(元) 초기의 한족 민족주의자들도 그의 시를 아꼈었고, 청(淸)에 이르면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비평가 심덕잠(沈德潛)은 그의 시를 두고 ‘천지간에 이런 문필은 없을 것’이라고까지 했습니다. 근대에는 청(淸) 말의 혁명가 담사동(谭嗣同), 중국 근대문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루쉰(鲁迅),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毛泽东) 등도 그의 시를 애독하였다고 합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 역시, 이 <장진주>의 마지막 구절 ‘술은 유령(劉伶)의 무덤 위에 이를 수 없으리니’라는 대목에 착안해 <속장진주>를 지었으며, 송강 정철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시조인 <장진주사>를 지었습니다. 그러니 그의 기괴했던 시풍은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끼쳤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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