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포교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도남 보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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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포교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는 도남 보현사
  • 이진영 기자
  • 승인 2020.04.29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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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현사 주지 자경 스님
보현사 주지 자경 스님

한 때, 제주시 도남동은 제법 북적거리던 곳이었다. 도심이 좌우로 크게 확장되면서 예전 같은 북적거림은 많이 줄었지만, 그래도 시청번화가와 인접한 지역이어서 제법 왕래가 잦은 동네이다. 차들이 곧잘 뒤엉키는 도남오거리에서 서쪽을 바라보고 걷다보면, 길 좌측으로 나지막한 언덕배기에 단정하게 올라앉은 대웅전이 보인다. 속(俗)은 끊임없이 도로를 따라 흐르는데, 성(聖)은 요란스런 흐름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앉아 내려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뒤로 야트막한 언덕배기를 등지고 바다를 향해 돌아앉은 것은 아마 본사인 관음사와 관음사의 조산격인 한라산의 영험함에 기대고자했기 때문이었으리라.

1955년에 세워진 보현사 대웅전
1955년에 세워진 보현사 대웅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보현사는 한창 등불을 달며 부산스러웠다. 형형색색의 등이 화려했지만 사실 보현사는 제주 현대사의 비극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도량이다. 이곳의 내력을 말하자면 먼저 관음사의 내력부터 시작해야한다. 또한 관음사를 말하자면 제주불교의 내력부터 되짚어봐야 한다. 과거 탐라국은 요즘의 싱가포르마냥 해양국가로서 개방성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외래의 불교와 전래의 전통 신앙들이 거부감 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하던 시대로부터 ‘절 오백 당 오백’이라는 호시절을 거쳐, 조선 후기 부처가 없는 ‘무불(無佛)시대’는 어둡고 길었다. 수면 아래로 면면히 이어지던 제주불교는 1909년 안봉려관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하며 부흥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보였지만, 1948년 시작된 4·3이라는 광풍이 제주 전체를 쓸어버렸다. 이 광풍이 제주불교만 비껴갈리 만무했다. 도내 90여개의 사찰 가운데 40여개 사찰이 피해를 입었고 많은 스님들이 희생되었는데, 다음 해 1949년 2월 12일 관음사도 전소되고 만다.

부처님 오신날을 맞은 보현사
부처님 오신날을 맞은 보현사

 

1955[불기 2982]년 4월 16일, 바로 이 자리에서 봉려관스님과 성해스님의 맥을 이은 법선[원덕성보살]스님의 주도로 십시일반 힘을 모아 완공된 보현암에서 증명법사에 김설호 큰스님, 관음사 주지 서경보 스님 등을 모시고 낙성식 및 봉불식을 거행했다. 보현암을 ‘신관음사’ 혹은 ‘알관음사’라고 불렀다는 증언은 이 사찰의 탄생의 의미를 분명하게 알려준다. 4·3으로 더 이상 한라산 중턱에서는 포교활동이 어려워지자, 대안으로 시내에 마련한 것이 이 사찰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보현암에서 이름을 바꾼 현재의 보현사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대가 낳은 사찰인 셈이다. 
1955년에 낙성한 대웅전의 벽채는 제주 특유의 현무암으로 쌓았다. 검은 색의 현무암과 돌 접합부를 메운 회색 시멘트의 조화가 우리네 돌담집을 닮아 친근하다. 지붕 역시 흔한 재료였던 슬레이트를 얹었지만, 대웅전인 만큼 팔작지붕으로 제법 격식을 갖추려 애쓴 노력이 읽힌다. 대웅전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아치형 창문이다. 이런 창문은 여타의 제주 사찰에서는 본 적이 없으며, 모르긴 해도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문 형태일 것이다. 벽체는 제주 고유의 양식을, 지붕은 불교 전통의 양식, 창문은 서구의 양식을 따른 셈이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인 양식들이 뒤섞여 보이지만, 묘한 조화와 함께 편안함을 보여준다. 문화란 무릇 이래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자경(自鏡) 주지스님의 안내로 대웅전으로 들어갔다. 아치형 창문으로 들이치는 햇살이 양명해서인지 법당 안은 편안했다. 본존불 좌측의 탱화 밑에는 보현사의 내력을 말해주는 화기가 있어서 창건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고, 대웅전을 둘러보고 나와 요사채에서 주지스님과 마주 앉았다. 

보현사 낙성 기념사진
보현사 낙성 기념사진

 

-오다보니 한창 공사 중인 것 같던데, 어떤 공사입니까?
-공사는 아니고요, 워낙 잡초들이 무성하고 어지러워서 정비하는 것뿐입니다. 
-아까 전에 본존불 오른편의 목조 나한상을 독성이라 말씀하셨는데, 나한을 단독으로 모시는 경우는 아직 보지 못했는데,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보통 큰 절에서는 담 밖에 삼성각을 모시는 경우가 있는데, 삼성이란 칠성부처님과 산신님, 그리고 나한인 독성을 모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마 이곳 보현사에는 삼성각이 없어서 나한인 독성을 모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본존불 왼편의 산신님의 그림을 보셨죠? 아마 그런 맥락일 것입니다.
-일종의 토속신앙을 흡수한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까?
-여타의 종교에 비해 불교가 가진 장점 중 하나라고도 볼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다양성이나 포용성, 혹은 공존 같은 개념이라고나 할까요. 
-이곳 보현사는 제주 현대사 혹은 제주불교의 비극적인 역사를 고스란히 품고 있는 사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제주사람들에게 이곳은 매우 의미가 깊은 공간인데요, 주지스님으로서 이런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활용하실지 궁금합니다.
-이곳 보현사를 저는 크게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 보고 있습니다. 원래 위치였던 이곳은 전통의 공간이고, 나중에 확장된 저쪽의 공간은 현대의 공간으로요. 요사채와 대웅전의 있는 이곳은 원형보존에 힘쓸 생각입니다. 아까 보신대로 대웅전 건물 자체가 가지는 시대적 의미와 독특한 건축양식-주지스님은 이 양식을 화(和)양식으로 불렀는데 아마 일본양식이라는 말 같았다-과 대웅전 안의 탱화와 목조 나한상 같은 것은 역사적 가치가 충분할 것으로 봅니다. 반면에 나중에 확장된 저쪽 공간은 보현사의 원래 취지였던 도심의 포교당으로서의 역할을 충족시켜줄 공간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가령 예를 들자면, 불교문화원 같은 신축시설을 통해 포교에 좀 더 효율적인 쓰임새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보현사 대웅전 내부
보현사 대웅전 내부

 

주지스님은 이곳의 이름이 ‘보현사’인가 아니면 ‘보현암’인가하는 기자의 질문에 하고 싶었던 말씀이 많았던 모양이었던지 말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곳의 본래 이름은 보현암이 맞으며, 보현암의 기능이나 목적은 도심 포교의 전진기지였으니, 이제라도 다시 원래 이름과 취지를 다시 복원해야한다고 말씀이었다. 이외에도 제주 전반에 관한 이야기까지 두서없이 나누다가 차가 충분히 식었을 때 쯤, 취재를 마치고 주섬주섬 카메라를 챙기고 일어서려다 갑자기 정명(正名)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름을 바로잡는 일, 그게 보현사의 급선무였다. 주지스님의 구상대로 소망대로 보현사가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며, 도심 표교의 중심이 될 날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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