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 불교의 바른 이해
상태바
기고 - 불교의 바른 이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5.07 14: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글 _ 권표스님 (일본 교토 고려사)
글 _ 권표스님 (일본 교토 고려사)

소납이 불교를 접한 지 강산이 네 번 변해간다. 그동안 불교와 관련된 책도 많이 읽어 보았고, 선지식이라 하여 지명도가 있으면 빼지 않고 찾아뵈었으며, 인도 4대 성지순례도 하였고, 부처님 재세시와 흡사한 ‘미얀마’가서 수행도 해 보았다. 그런데 막상 누가 ‘’과연은 불교는 무엇이고, 수행을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하고 묻는다면 답변이 궁색해진다. 
지금 우리나라나 일본 불교 사회에서 이 보다 더 어려운 질문도 드물 것이다. 한편에서는 ‘’ 생활이 그대로 불교이니라’’ 가르치고 있는 데, 다른 편에서는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여야 한다’’ 고 말한다. 또 다른 한 종파에서는 ‘’오직 아미타불에 의지해야 한다’’고 외치는 데, 저 쪽의 또 다른 종파에서는 ‘’불교는 자립이 기존이다’’라고 주장한다. 그렇게 서로 다른 주장들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초학들은 물론 불교를 꽤 공부했다는 이들조차도 방향을 잡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니 혼란 속에서 자기 견해를 지키기 위해 턱없이 고집스러워지기게 되기도 한다. 이 스님, 저 학자의 말을 다 듣다가는 ‘’팔려 가는 당나귀 우화에서처럼,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 염려되기 때문이다. 
한국 불교의 특징이 통불교임은 널리 알려져 있다. 즉 대승불교, 여러 철학(종파)의 차별성을 강조하기보다는 그 공통성에 주목해 온 것이 원효-의천-보조-서산으로 이어져 온 한국 불교 사상의 큰 흐름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우리는 통불교의 너그러운 포용정신을 안팎에 널리 자랑해 왔다. 물론 통불교가 잘 되었을 경우 너그러운 포용 정신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잘못 되었을 경우에는 어떨까? 그때 통불교는 바른 길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혼란 속에 방황하는 모습을 변명하는 거짓된 용도로 전락해 버리는 것은 아닐까? 
부처님께서는 진리를 깨달으셨고, 거기서 불교는 시작되었다. 그리고 진리는 진리 아닌 것과 대립한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바가 옳다면 다른 가르침은 옳지 않아야 하고, A 종파가 옳다면 B 종파는 옳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자력을 강조하는 선과 타력을 강조하는 미타 신앙이 함께 긍정되며, 앎을 강조하는 쪽과 믿음을 강조하는 쪽이 더불어 수용될 수 있을까? 
물론 자력과 타력, 앎과 믿음은 상대적이기도 하고 상보적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둘의 관계가 반드시 배타적일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그것이 상보적이 되려면 먼저 자력과 타력, 앎과 믿음의 개념이 뚜렷하게 정의된 후여야 한다. 그런 뒤에 그것들이 어떻게 서로 다르면서 어떻게 서로 조화되는지, 어떻게 같은 목적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분명하게 밝혀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조리와 표현을 잘 갖춘 법을 설하라’’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논리적인 치밀성과 문학적인 아름다움까지 갖추어 법을 설하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데도 한쪽에서는 불립문자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혜능 선사는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으라 하였는데, 저들은 무식을 종으로 삼는다’’고 비판한다. 
이 혼란을 어찌하면 좋을까? 필자 또한 이 같은 우리 불교계의 사정 속에서 오랜 날을 두고 방황과 혼란을 겪어 왔다. 그리고 이제는 어느 정도 옥석을 분간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내가 이나마 안심입명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에 의해서였던가? 그것은 불법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분별과 선택, 그리고 그럼으로써 찾아낸 순수한 불법에 입각하여 실천, 수행된 힘에 의해서였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나는 먼저 이 같은 혼란이 왜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다음 몇 가지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첫째, 부분으로써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 종파의 입장에서 불교를 보는 경우이다. 천태의 입장, 화엄의 입장, 미타의 입장을 앞세운 뒤 그를 기준으로 불교를 정의 내리기 때문에 불교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그러나 천태, 화엄, 미타보다는 불교가 더 앞선 것이요, 더 넓은 개념이다. 그러므로 보다 앞선 것, 보다 넓은 것부터 바르게 정의 내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래도 이 경우는 좀 나은 편이다. 
이보다 더 곤란한 것이 ‘우리 스님’의 입장에서 불교를 보는 경우다. 이들은 부처님과 불교 또한 ‘부처님에 의한 우리 스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스님에 부처님’이요. ‘불교에 의한 우리 스님의 말씀’이 아니라 ‘우리 스님의 말씀에 의한 불교’인 것이다. 이 얼마나 우스운 주객전도인가? 먼저 이런 뒤집힌 견해부터 부술 일이다. 
둘째, ‘하류’로써 ‘상류’를 보기 때문이다. 이천오백 년 후의 불교를 바탕으로 구성한 선입견을 갖고 이천오백 년 전의 불교를 이해한다(또는 중생의 안목으로써 부처를 이해한다). 그러나 불교 이해는 부처님 당시의 불교부터 이해한 다음 후대로 내려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불교의 본모습과 그에 덧붙여진 ‘때’와 ‘이끼’를 변별하여 제거해 낼 수 있다. 또한 부처님의 심오한 지혜는 ‘끌어 내려서’ 이해할 일이 아니라 ‘올라가서’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비판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셋째, 색안경을 끼었기 때문이다. 첫째, 둘째의 입장에서 불교를 보기 때문에 선입견, 고정관념, 편견 등의 색안경이 생겨난다. 이런 색안경을 끼고 불교를 보면 안경의 색깔로만 보이는 법이다. 그렇게 하여 얻은 견해는 안경의 견해이지 진실한 견해가 아니다. 하물며 외도들이 끼고 있는 색안경의 무익함이야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하겠다. 나아가 이 색안경은 비단 불교만 관련하여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인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여자가 아닌 남자로서, 아이가 아닌 어른으로서 등, 색안경의 종류는 일일이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리고 여기서 생겨난 고정관념, 편견, 굴절된 시각 등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된다. 더 나아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하는 불교 이해에 있어서도 장애가 되는 것이다. 
넷째, 무지와 욕망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중생이 중생인 것은 무지(무명)와 욕망에 물들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은 많든 적든 간에 무지, 욕망에 물들어 있고, 따라서 중생은 불교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그 점은 필자 또한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어떻게 진리를 보아 나갈 수 있는지는 확실한 객관성을 가지고 공부해야만 한다. 여기서 무지란, 첫째로 중생은 ‘전체지(全體知)’가 아닌 ‘부분지’에 한계 지어져 있음을, 둘째로는 그 부분지나마 뒤죽박죽이 되어 있어서 올바른 체계로 편성되어 있지 못함을, 셋째로는 ‘경험지’가 아닌 ‘개념지’에 얽매여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욕망은 욕망에 대응하는 두 방법인 ‘욕망 채우기’와 ‘욕망 없애기’ 가운데 전자에만 경도되어 후자를 중심으로 하는 불법을 받아들이지 못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중생은 자기의 탐진치를 ‘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채우기 위해서’ 불법 앞에 다가온다. 이에 따라 복을 준다는 가르침은 반갑게 여기면서 욕망을 없애라는 가르침은 싫어한다. 이 같은 욕망에 기울어짐은 중생의 ‘법눈’을 가리기 때문에 그는 진정한 불법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상 여러 가지 이유들이 중생을 불교에 관한 ‘근시, 원시, 난시, 색맹’으로 만든다. 나아가 아예 장님으로 만들기까지 하는데, 이런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끝을 맺기에 앞서 개구리 법칙이 있는 데, 큰 가마솥에 찬물을 가득히 채워 시퍼렇게 살아있는 개구리를 집어넣고 밑에서 서서히 불을 지피면 개구리가 튀어나오지 않고 서서히 뜨거워지는 물에 적응하여 데어 죽어버린다. 아무쪼록 부처님의 가르침이 온누리에 바르게 이해되기를 염원해 본다. 


(*외부 기고문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