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성인[詩聖], 두보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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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성인[詩聖], 두보②
  • 이진영 기자
  • 승인 2020.05.13 1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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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기자의 교양으로 읽는 漢詩 ③
두보 동상(중국 청뚜)
두보 동상(중국 청뚜)

고지식하기 이를 데 없었던 두보는 ‘안사의 난’으로 가족을 부주로 피난시켜둔 뒤, 혼자 숙종이 있다는 영무로 가다가 반도들에게 붙들려 장안으로 끌려오고, 장안에 연금된 상태에서 지은 시가 앞서 살펴본 <춘망(春望)>입니다. 757년(지덕 2) 안녹산이 그의 아들 안경서 일파에 의해 살해되고, 동요하기 시작하자, 두보는 4월에야 유폐되었던 장안을 벗어나, 봉상으로 가서 마침내 숙종을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난리 통에 위험을 무릅쓰며 자신을 찾은 두보를 갸륵하게 여긴 숙종은 그에게 좌습유(左拾遺)라는 벼슬을 내립니다. 
성군(聖君)을 도와 태평성세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오랜 숙원을 달성한 두보는 감격했겠죠. 하지만 사실 두보는 능란한 행정가나 정치인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눈치 없이 재상 방관(房琯; 697-736)을 변명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숙종의 심기를 건드려 부주에 있는 가족에게 가 있으라는 명을 받고 장안을 떠나야 했습니다. 점잖고 조용하게 내쫓긴 겁니다. 10월 19일 숙종이 장안으로 환궁했고, 이에 두보도 11월에는 장안으로 돌아와 다시 조정에 출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건원 원년(758) 6월, 방관이 빈주자사로 좌천됨에 따라 다시 내쳐집니다. 관운(官運)이 없는 것으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잦은 방출입니다.
다음해 759년, 두보는 진주에서부터 여러 지역을 전전하여 성도(成都)에 정착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두보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풀로 엮은 집, 초당(草堂)을 짓습니다. 나중에는 엄무(嚴武)의 추천으로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郞)이란 벼슬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기에도 잘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얼마 후 엄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두보는 성도를 떠나 운안(雲安)을 거쳐 기주(夔州)까지, 길고 긴 표박(漂迫)의 시기가 시작됩니다. 역설적으로 이때야말로 자신의 뜻을 얻지 못했기에 그야말로 제대로 울어대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문예전통에는 불평즉명(不平則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굳이 풀어쓰자면, 마음이 고르지 못한 그 어떤 것 가령 불평 같은 것이 있어야 울게 되고 그 결과 위대한 문학작품이 나오게 된다는 말이겠죠. 이 말은 당나라의 문학가 겸 사상가 한유(韓愈)가 지인 맹교(孟郊)를 위로하며 쓴 <맹동야에게 보내는 글(送孟東野序)>에서 처음 사용한 말입니다. 맹교 역시 여러 차례 과거에 낙방하다가 4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50세가 넘어서야 겨우 율양현위(凓陽縣尉)가 되었던 인물입니다. 친구 맹교가 부임을 위해 율양으로 떠날 때, 때를 못 만나서 고생하는 벗을 위로하며 건넸던 위로의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저는 두보의 시들 중, 이 시기에 지어진 시들을 가장 좋아합니다. 한시 입문은 1976년에 출판된 《두보의 생애와 문학》이라는 책으로부터 시작했기에, 두보에 대한 감정은 조금 특별한 편입니다. 두보의 시 중, <봄밤에 내리는 좋은 비[춘야희우(春夜喜雨)]>라는 시는 잘 알려진 칠언율시입니다. 워낙 시가 좋아 서예전에서도 가끔 보입니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野經雲俱黑  江船火獨明 
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좋은 비는 그 내릴 시절을 알고 있나니    
봄이 되면 내려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구나.    
비는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내리나니   
사물을 적시거늘 가늘어서 소리가 없도다.    
들길은 낮게 드리운 구름과 함께 캄캄하고    
강 위에 떠 있는 배 고기잡이 불만 밝게 보인다.    
날 밝으면 붉게 비에 젖어 잇는 곳을 보게 되리니    
금관성에 만발한 꽃들도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으리라.    


이 시 역시 앞에서 살펴본 <춘망(春望)>만큼이나 유명합니다. 시에서 느껴지는 그 무엇이 있다는 말이겠죠. 하지만 어디가 어떻게 좋으냐고 물어보면,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합니다. 끈질기게 조르거나 다그치면, 간혹 세 번째 연이 좋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들길 위로 뻗은 길을 덮은 검은 구름과 어두운 강 위로 홀로 밝은 고기잡이배의 등불, 시각적 이미지가 참 좋습니다. 강렬한 대비가 인상적이고, 두 구에서 배어나오는 묘한 슬픔 역시 아찔한지라, 저 역시 좋아합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두 번째 연, ‘바람타고 밤에 몰래 스며들어와, 가늘게 소리도 없이 만물을 적셔주네’라는 대목을 좋아합니다. 봄비는 보통 소리 없이 조용히 내립니다.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모두가 잠든 밤에 내려버리면 놓치기 쉽습니다. 밤에 슬며시 내리는 봄비를 느낄 수 있다는 말은, 그가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두보는 자신이 바라는 세상을 만나지 못해 불우했고 지금은 조정에서 쫓겨나 떠도는 신세였지만, 끝까지 자신의 뜻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괴리(乖離)라고 해냐 하나요,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큽니다. 그래서 잠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이겠죠. 저는 그의 불면을 이해하고 사랑합니다. 비에 젖은 대나무 잎의 싱그러움이 느껴지는 동시에 두보의 불면이 느껴지는 대목이어서 읽을 때마다 느낌이 새롭고 이 대목을 가장 좋아합니다.
두보가 머물던 기주는 성도에 비해 낯선 곳이었지만, 비교적 물산이 풍부했던 이곳에서 두보는 어느 정도 심신의 안정을 찾아가며 시 창작에서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그러나 두보는 이런 기주 생활에도 결코 안주하지 못합니다. 성군을 도와 태평성세를 이루고야 말겠다는 그의 오랜 꿈이 그를 다시 일으킵니다. 768년, 드디어 협곡을 빠져 나가 강릉(江陵)을 거쳐 악양(岳陽)으로 길을 잡아갑니다. 이후 그의 생활은 주로 배 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 그것의 그의 건강을 해쳤던가봅니다. 건강이 악화되고 경제적으로 궁핍한 가운데 악양(岳陽)과 담주(潭州) 사이를 전전하다가, 끝내 강 위에서 770년 59세로 표박(漂迫)의 일생을 마쳤습니다. 사실 두보를 포함한 왕유·이하·이백 모두 당시(唐詩) 사걸(四傑) 모두 시대를 만나지 못했던 셈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편안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나름의 목소리로 울어댔습니다. 그 울음소리가 천하를 진동시키며 당시(唐詩)의 전성기를 견인했던 셈이니, 문학이란 참 난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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