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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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룽먼석굴(龍門石窟) (5)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5.13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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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9)
▲(사진2) 봉선사동 노사나불 얼굴
▲(사진2) 봉선사동 노사나불 얼굴

룽먼석굴을 다녀온 분에게 가장 인상적인 석굴을 하나를 꼽으라고 물으면 대부분 봉선사동이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굴들의 불상과 비교되지 않는 압도적인 크기의 봉선사동 불상은 경탄 그 자체로 한번 보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강 건너에서 룽먼석굴 전체를 조망할 때 다른 굴들은 굴 입구가 사각형 점 모양으로 보이는데 반해 봉선사동은 멀리서도 불상은 물론 불상을 에워싼 아난, 가섭, 협시보살과 천왕, 역사 등 권속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로 크다. 게다가 봉선사동에 전하는 전설 때문에 봉선사동의 불상을 한번 더 보게 된다. 봉선사동은 672년에 만들기 시작해서 675년에 완성되었다. 이 시기는 당나라 3대 황제인 고종 때로 우리나라로 치면 장희빈처럼 중국 사극의 단골 주인공 중 한 명인 측천무후가 활약한 시기이다. 
측천무후는 638년 13세에 고종의 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 당시 황제가 죽으면 후궁들은 감업사라는 절에 들어가 비구니 생활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측천무후도 태종이 죽자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었는데 이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던 고종이 그녀를 궁으로 맞아들여 비로 삼았다. 이후 무후는 자신의 연적인 비빈들을 제거하고, 655년에는 황후마저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후가 된다. 나약했던 남편 고종은 아내인 무후에게 의지했고, 무후는 고종이 죽을 때까지 대부분의 정사를 대신 보았다. 강력한 힘을 갖게 된 무후는 자신이 시아버지인 태종의 후궁이었다는 점을 들며 황후 되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을 하나둘씩 제거해나갔다.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면 자신이 낳은 자식도 제거 대상이었다.

▲(사진3) 봉선사동 노사나불 좌측 아난존자와 협시보살상
▲(사진3) 봉선사동 노사나불 좌측 아난존자와 협시보살상

대신들의 지지를 받던 첫째아들 홍(弘)과 둘째 아들 장회태자를 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죽게 만들었다. 대신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인재를 잘 활용하여 국가를 효율적으로 운영했다. 683년 고종이 죽자 세째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중종이다. 그런데 중종의 비인 위황후가 자신도 시어머니인 무후처럼 권력을 휘두르려고 하자 무후는 황제에 오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은 중종을 폐하고 막내아들을 황제로 내세웠다. 이 예종도 이름만 황제지 황실의 모든 실권은 어머니인 무후에게 있었다. 결국 6년 뒤인 690년에 무후는 65세의 적지 않은 나이에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 이후 15년 동안 통치하다 폐한 중종을 불러들여 그에게 양위를 했다. 자신이 통치하던 시기에는 국호를 당 대신 주(周)로 바꾸기까지 했다. 비록 정적들을 제거할 때는 무자비했지만 인재들을 잘 중용하여 국가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다는 평가를 받는다. 죽은 뒤에는 남편인 고종의 무덤 건릉에 합장되었으니 죽어서도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권위를 전혀 잃지 않은 유일무이의 여장부였다.  
룽먼석굴에서 석굴 조성이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가 이 측천무후 시기였고, 그중에서도 그녀가 황제가 된 7세기 후반에서 황위를 물려주고 죽은 705년까지로 불상 조성이 갑자기 증가한다. 이는 그녀의 적극적인 후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머니가 열렬한 불교신자여서 측천무후는 어려서부터 불교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다. 황후가 된 후 675년 기념비적인 불상을 룽먼에 만듦으로써 자신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만불동, 뇌고대 등의 석굴도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룽먼석굴에 미친 이러한 측천무후의 영향력 때문에 봉선사동의 불상 얼굴이 그녀를 모델로 했다는 얘기가 전한다. 그게 맞든 맞지 않든 봉선사동에 가게 되면 과연 그런가 하고 한번 더 불상의 얼굴을 뜯어보게 된다. 

▲(사진1) 룽먼석굴 봉선사동
▲(사진1) 룽먼석굴 봉선사동

 

룽먼석굴에서 가장 큰 봉선사동(사진 1)의 불상은 높이 20.16m로 대좌 북측에 새겨진 ‘대노사나상감기(大盧舍那像龕記)’에는 고종과 측천무후가 672년에 발원하여 675년에 완성했다는 명문이 있다. 노사나불은 화엄경의 가장 중요한 부처로 온 몸의 털구멍에서 화신불을 나투어 중생을 교화하는 광대무변의 부처님이다. 이를 증명하듯 대좌의 연꽃잎에는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노사나불의 얼굴(사진 2)을 가만히 살펴보면 여느 불상의 얼굴과는 다른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진4) 봉선사동 노사나불 우측 다보천왕과 금강역사상
▲(사진4) 봉선사동 노사나불 우측 다보천왕과 금강역사상

 

어떤 사람은 부처님의 성스러움보다 여성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마 측천무후의 얼굴을 모델로 했을 것이라는 전설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드는 것일 수 있다. 그만큼 선입견은 우리의 인상에 큰 영향을 준다. 노사나불 좌우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제자인 아난과 가섭이, 그 다음에 협시보살이 한 분씩 서 있다. 가섭의 경우 얼굴 부분이 풍화에 파괴되었지만 아난상(사진 3)은 젊은 수행자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협시보살 다음에는 천왕과 금강역사상이 한 분씩 조각되었다.

▲(사진 5) 680년 일만오천불을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만불동 본존불
▲(사진 5) 680년 일만오천불을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진 만불동 본존불

노사나불 오른쪽에 만들어진 천왕은(사진 4) 왼손은 허리에 두고 오른속으로는 탑을 받쳐들고 있는 다보천왕으로 추정되는데 석굴암 사천왕상에서와 마찬가지로  두 발로 악귀를 밟고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가장 바깥쪽에 조각된 금강역사상은 목에 굵은 힘줄이 선 위압감을 주는 강하고 힘찬 모습이다. 황실에서 발원한 석굴이어서 당시 최고의 장인들이 고용되어 조각되었을 것이므로 이 봉선사동의 불상들은 이후 조성되는 룽먼석굴의 당나라 불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석굴 천장의 연꽃 주변에 680년에 일만오천불을 조성한다는 명문이 새겨진 만불동도 측천무후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정벽의 본존불상은 당당했던 봉선사동의 불상과 달리 단아한 느낌을 준다. 특이한 점은 룽먼석굴에서 비구니에 의해 조성된 대부분의 불상이 이 석굴 속에 있다는 것이다. 1300년 더 지난 오늘날까지 석굴의 불상들이 전하는 것은 아마 작은 불상 하나하나에 담긴 염원이 간절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5) 만불동에 새겨진 작은 불상들
▲(사진5) 만불동에 새겨진 작은 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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