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① - ‘쓸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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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① - ‘쓸모’에 대하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5.20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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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시인
박인수 _ 시인
박인수 _ 시인

목수 장석(匠石)이 제나라로 가다가 사당 앞에 있는 큰 도토리나무를 보았다. 그 크기는 수천 마리의 소를 덮을 만하였고, 그 둘레는 백 아름이나 되었으며, 그 높이는 산을 위에서 내려다볼 만하였다. 장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지나가 버렸다. 그의 제자가 장석에게 달려가 물었다. 
“제가 도끼를 들고 선생님을 따라다닌 이래로 이처럼 훌륭한 재목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선생님께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니 어찌 된 일입니까?”
장석이 말했다.
“그런 말 말아라. 쓸데없는 나무다. 그것으로 배를 만들면 가라앉고, 관을 만들면 빨리 썩어버리고, 그릇을 만들면 쉬이 깨져버리고, 문짝을 만들면 나무진이 흘러내리고, 기둥을 만들면 곧 좀이 먹는다. 그것은 재목이 못 될 나무야. 쓸모가 없어서 그토록 오래 살고 있는 것이야.“
『장자(莊子)』의「인간세(人間世)」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잠시 생각해 보자. 여기서 ‘쓸모’란 무엇일까.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에게 유용한 것이다. 나무(자연)의 쓸모가 나무 자체의 생존이나 번식에 있지 않고 인간 중심적 사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보호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엔 자연을 대상화시켜 인간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망상과 오만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월든 Walden』의 저자 헨리 데이비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했으나 부와 명예를 좇는 직업 대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고 삶의 참된 의미를 직접 경험해보기 위해 월든 호숫가의 숲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살았다. “마침내 죽음을 맞이했을 때 내가 헛된 삶을 살았구나 하고 깨닫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기준으로 보면 부와 명예를 좇는 건 쓸모 있는 일이고,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고 삶의 참된 의미를 직접 경험해보는 건 쓸모없는 일일 터다. 이렇게 삶의 의미보다 부와 명예를 좇게 되는 왜곡된 인식은 문명을 ”현명해진 야만인“들만이 점유하도록 만들고 급기야 지구를 파탄나게 한다. 
지금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19 또한 그런 인식의 소산이다. 인간과 병원균의 공진화 과정은 인류의 문명과 궤를 같이 한다. 인류는 오직 스스로만을 위해 문명을 발전시켰고 그 과정에서 지구를 파괴했으며 그것이 인간에게 되돌아온다는 것이 드러났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조류독감-전염병의 사회적 생산』에 따르면 ”인간과 병원균 사이의 관계를 재편“하는 네 번의 변화가 있다고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즉 신석기 혁명과 고대 유라시아 세계의 탄생은 아직까지는 인간을 위한 문명이었다. 그러나 세 번째인 16세기 근대 세계 체제의 형성, 즉 자본주의 체제엔 주도권이 서서히 인간에게서 자본으로 넘어가고, 네 번째인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이르면 자본이 주도권 확립을 완성한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을 위해서 문명을 더욱 발전시키지만 그로 인해 수많은 질병의 위험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병원균은 인간에게는 두려운 존재지만 이제껏 인간과 같이 살아왔다. 아마존 밀림 속에서, 남아시아의 정글 속에서, 시베리아 동토 속에서 각기 자기만의 생존 방식으로 살아온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비행기 여행, 습지 파괴, 기업형 농축산업, 제3세계 도시화와 거대한 슬럼의 성장 등으로 자신들의 집(숙주)을 파괴하자 어쩔 수 없이 인간에게 드러난 것뿐이다. 인간과 무관하게 잘 살고 있던 것들을 인간 아니, 자본이 불러냈을 뿐이다. 
우리는 흔히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대할 때 차등을 두지 말아야 한다’거나 ‘편견을 두지 말아야 한다’, 혹은 ‘어떤 면에선 쓸모없는 것이 다른 면에선 쓸모 있을 수도 있다’는. 장자가 단지 그런 까닭만으로 ‘쓸모없음의 쓸모 있음’을 주장했을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인간의 기준으로 다른 모든 것들(자연)을 판단하고 평가하며 죽이는 태도를 비판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목수 장석이 큰 도토리나무를 쓸모없는 나무라고 했던 그 날 밤, 그 큰 나무가 장석의 꿈에 나타나 하는 말처럼.
”나는 쓸모없기를 바란 지가 오래다.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이제야 뜻대로 되어 쓸모없음이 나의 큰 쓸모가 된 것이다. 만약 내가 쓸모가 있었다면 어찌 이렇게 커질 수 있었겠는가? 그대와 나는 다 같이 하찮은 물건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하여 서로를 하찮은 것이라고 헐뜯을 수 있겠는가? 그대처럼 죽을 날이 멀지 않은 쓸모없는 사람이 어찌 쓸모없는 나무를 알 수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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