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문화기행 - 동서문명이 교차하던 간다라평원의 웅장한 산채승원 탁티바히
상태바
불교문화기행 - 동서문명이 교차하던 간다라평원의 웅장한 산채승원 탁티바히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5.20 14:5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정하(여행작가)
▲벽을 쌓은 이 돌들은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청석으로, 벽돌처럼 잘라서 구축했고, 화강암을 편편이 잘라 쌓은 건축법은 탁실라에서와 같은 공법이다.
▲벽을 쌓은 이 돌들은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청석으로, 벽돌처럼 잘라서 구축했고, 화강암을 편편이 잘라 쌓은 건축법은 탁실라에서와 같은 공법이다.

 

탁티바히(Takht-i-Bahi)를 가려면 페샤와르를 거쳐야 한다. 페샤와르에서 탁티바히까지는 약 80Km이다. 
페샤와르는 전란이 끊이지 않는 비운의 땅이다. 2007년 7월 16일에는 아프간 피랍사태가 발생한다. 그 탈레반 세력의 거점 도시가 페샤와르와 그 이웃한 스와트 지역이었다. 아프가니스탄과의 국경은 페샤와르에서 불과 50km 정도의 거리다. 
2014년 12월 16일에는 페샤와르학교 학살사건이 일어났다. 탈레반에 의한 자살폭탄테러로 132명의 학교 교직원과 학생이 죽고 245명이 부상당했다.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인 1906~7년,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페샤와르박물관내의 유적 잔해들. 성한 유물들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영국군에 의해 발견된 후, 곳곳으로 반출되었다.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인 1906~7년, 빅토리아 여왕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는 페샤와르박물관내의 유적 잔해들. 성한 유물들은 이미 19세기 후반에 영국군에 의해 발견된 후, 곳곳으로 반출되었다.

 

역사적으로도 페샤와르는 자부심이 강한 파키스탄 부족과 전사들이 거주하는 메마른 땅이었고, 생계를 위해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분쟁지역 간에 무기 밀수를 하며 살았다. 
페샤와르는 페르시아어로 ‘고지대의 요새’란 뜻이다. 지금 페샤와르가 있는 지역은 기원전 2세기에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의 왕 에우크라티데스에 의해 합병되었으며, 2세기에 쿠샨 왕조의 카니슈카 왕은 푸르샤푸라에 수도를 두었다. 불교가 융성했던 이곳은 998년에 터키계 무슬림에 점령되면서 이슬람화 되었고, 16세기에 무굴 제국의 악바르에 의해 ‘변경 도시’라는 뜻의 페샤와르란 이름이 붙여졌다. 그 뒤 1838년 시크 왕국에 점령되었으며, 1849년에는 제2차 시크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다. 

▲간다라 평원에 우뚝솟은 탁티바히가 성채처럼 자리하고 있다. 중심 능선의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탑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주위에 돔 지붕을 한 네모반듯한 방들이 둘러쳐 있다. 탑 옆에는 불상을 모신 불전이 있고 불전 남쪽에는 또 하나의 탑군이 있다. 불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탑이 있고 주위에 승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양식이다.
▲간다라 평원에 우뚝솟은 탁티바히가 성채처럼 자리하고 있다. 중심 능선의 사원 안으로 들어가면 탑이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주위에 돔 지붕을 한 네모반듯한 방들이 둘러쳐 있다. 탑 옆에는 불상을 모신 불전이 있고 불전 남쪽에는 또 하나의 탑군이 있다. 불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탑이 있고 주위에 승방들이 배치되어 있는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양식이다.

 

이 도시는 아프간, 페르시아, 그리스, 마우리아, 스키타이, 아랍, 투르크, 몽골, 무굴, 시크와 영국 등 많은 세력들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 이는 페샤와르가 예로부터 동서 교역로인 비단길의 주요 거점 도시 가운데 하나였고 다양한 문명의 교차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다라 왕국의 불교 유적이 많이 남아 있으며 교통 요충지로서 상업이 발달하였다. 
한편 1980년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후 페샤와르에는 아프간 난민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무자헤딘 그룹의 정치적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도 파키스탄 내 파슈툰족의 문화적 수도 구실을 한다. 

▲한국의 가상현실기술로 복원한 사원 중앙의 주탑.
▲한국의 가상현실기술로 복원한 사원 중앙의 주탑.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곳을 방문하여 기록을 남겼다. ‘왕오천축국전에는 “왕과 군사는 모두 돌궐족이다. 토착민은 오랑캐족이고 바라문(인도종족)도 있다. 큰절에는 천진보살(세친, 바수반두, 대승 학자로서 <아비달마구사론>의 저자이며, <유식이십론>, <유식삼십송>을 저술하여, 기존의 유식설을 압축하고 보완했다.)과 무착보살(아상가, 세친의 형이다. 미륵이 설했다는 유식사상을 조직적으로 집대성해서, 교리적 기초를 이룩했다. 처음에는 소승의 공관(空觀)을 수행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미륵에게 대승 공관을 배워서 대오(大悟)했다고 한다.)이 살았고 큰 탑이 있는데 항상 빛을 내뿜고 있다. 또 동쪽 마을엔 부처님이 과거 시비카왕이 되어 비둘기를 날려 보낸 곳이 있다”고 기록했다. 이 탑은 2세기 경에 지은 사지키데리 사원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사원 터에는 지금은 벽돌공장이 들어서 있어 그 옛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다.  

▲탁티바히에서 출토된 간다라 좌불상
▲탁티바히에서 출토된 간다라 좌불상

 페샤와르로부터 약 80Km 떨어진 곳에 152m 높이의 언덕 정상에 위치한 유명한 불교 수도원 탁티바히(Takht-i-Bahi)에는 고도로 발달된 간다라미술의 조각들과 치장들이 발견되었다. 
탁티바히는 ‘바위의 샘’이란 뜻이며, 서기 1세기 초에 세워졌고, 7세기 말까지도 인적이 끊이지 않았다. 2세기 무렵 이곳을 지나 천축국으로 순례 여행을 하던 중국 승려 송윤은 이 사원과 근처의 도시를 돌아본 후,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웅장한 건축물과 금박을 입힌 화려한 불상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또, 그가 거쳐 온 어느 곳보다도 가장 아름다운 사원이라고 기록했다. 지금도 간다라 지역에서 가장 유적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그러다가 훈족이 침입하여 465년경 살육과 방화로 탁티바히는 참화를 입고 지금까지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 구법승들의 거점이던 탁티바히는 그렇게 역사에서 잊혀 갔다. 
그리고 1869년 스와트에서 페샤와르로 가는 도중에 전형적인 산지가람인 탁티바히를 영국의 마구라칸 장군의 휘하 한 병사가 발견했다. 그리고 1907년 첫 발굴조사를 시작하여 페샤와르박물관의 스푸너가 학술조사를 했고, 이후 하그리브스가 1913년부터 1929년까지 조사하면서 불탑보호시설도 만들었다. 
이렇게 발굴된 조사에 의하면 탁티바히는 벽돌로 쌓은 산상 3개소에 조성된 사원이다. 이곳의 사원에서 한 단 높은 산 능선 끝에도 건물지들이 있고, 중심사원 반대편에도 사원과 탑과 승방이 있다. 3개의 능선에 사원터가 남아있는 것이다. 
탁티바히는 남북으로 3개의 경내로 구획되어 있다. 남쪽으로는 주탑원, 봉헌사원, 승원으로 배치되어 있다. 주탑원의 탑은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는 한 변이 6m가량의 방형 기단만 남아 있고 옛 탑의 모습은 알 수 없다. 원래 탑의 모습은 높은 계단을 통해 복발형 탑신으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중앙탑 주변의 3면에는 감실들이 늘어서 있다. 감실의 지붕은 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승방 내에도 벽면은 감실로 조성되어 있다. 이 감실에는 불상들이 조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현재 4층높이의 거대한 건물이 남쪽을 향하여 2단과 3단에 걸쳐 남아있다. 대지는 훨씬 낮아져 반지하구조로 보이는데, 상부가 더 있었다면 5~6층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층에는 탑과 불상 등 여러 유물들이 있는 박물관 창고가 있다. 
이러한 능선을 층단으로 이용한 사원은 이 지역의 특색으로 바위능선에 마추픽추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절묘한 배치로 산악능선을 활용하여 세상과 떨어진 채 성곽처럼 버티고 있는 위용마저 느껴진다. 

▲탁티바히의 간다라지역은 그리스왕국의 밀린다(메난드로스)왕과 인도의 나가세나 스님의 문답이 행해졌던 곳이다.
▲탁티바히의 간다라지역은 그리스왕국의 밀린다(메난드로스)왕과 인도의 나가세나 스님의 문답이 행해졌던 곳이다.

 

사원의 너른 마당의 지하층으로 연결되는 곳에는 지하방이 존재한다. 비와 더위를 피해 승려들이 명상을 하던 장소로 추정된다. 
탁티바히 사원의 동서능선 곳곳에는 아직도 발굴되지 않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이로 미루어 이곳은 산 전체가 거대한 사원을 이루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산악지형을 이용한 대표적 산악사원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학자들은 이러한 양식이 이 지역이 잦은 이민족의 침략과 도적들로부터 사원을 지키고자 방어에 용이한 성곽식 사원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탁티바히 사원에서 내려다보면 끝없는 산악이 아래에 펼쳐진다. 아스라한 간다라평원은 무수한 역사적 각축장이면서 불교문명의 꽃인 간다라의 고향이다. 동서문화가 꽃피운 간다라의 고향이지만, 지금은 폐허만 남아 시간의 흐름에 무상한 쓸쓸함이 평원에 번진다. 
이곳은 나가세나 스님과 그리스왕국의 밀란다(메난드로스)왕이 문답을 나눈 <밀란다왕문경>의 고향이기도 하다. 
탁티바히는 동서문화가 만난 흔적이 탑의 조각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문명교류사의 중요한 유적이다. 1980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탁티바히는 한국의 가상현실(VR)기술로 디지털문화재복원을 통해 전시회가 열리기도 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