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② - 박 사장과 가정부 클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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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② - 박 사장과 가정부 클레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6.03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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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지난해 마을 어르신들께 글쓰기를 강의할 기회가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분이 이런 질문을 했다. ‘왜 글은 전부 가난하고 힘든 얘기만 쓰는가, 잘살고 행복한 얘기를 쓰면 안 되는가?’ 다른 수강생분들은 서로 얼굴만 쳐다보다가 결국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잘살고 행복한 얘기를 써도 되죠. 하지만 그런 얘기는 우리 삶과는 전혀 다른 얘기고, 고생 한번 안 한 사람의 얘기를 누가 읽겠어요? 감동이 없는데…….” 잠시 생각해 보자. 정말 잘살고 행복하기만 한 얘기는 감동이 없고 가난하고 힘든 얘기는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걸까? 
이해를 돕기 위해 두 편의 영화에 나타난 각기 다른 일상을 예로 들어 보자. 먼저 <기생충>에서의 박 사장. 아내가 깨워 줘서 일어난 다음 가정부가 차려 주는 아침밥을 먹은 뒤 수행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출근해서 비서가 타다 주는 커피를 마시면서 부하 직원들이 해 주는 프리젠테이션을 듣다가 사인만 하고는 수행기사가 운전해 주는 차를 타고 골프장에 가서 골프장 경기보조원이 들어다 주는 골프채로 골프를 치고……. 다음은 <로마>에서의 가정부 클레오. 아침 일찍 일어나 주인집 아이들을 깨워 준 뒤 아침 식사를 차려 주고 주인집 가족들이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설거지를 해 준 다음 아이들 방을 청소해 주고 아이들이 벗어 놓은 옷가지를 집어다가 빨래를 해 주고 유치원 끝마칠 시간에 맞춰 주인집 막내를 데려와 주고 나서 바람 난 남편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인집 여자의 눈물 섞인 하소연을 들어 주고 달래 주며…….

만약 이 두 사람이 일기를 쓴다면 어느 쪽의 일기가 더 감동적일까? 박 사장의 일기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박 사장과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할 테지만, 실제 우리에게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삶은 박 사장의 삶이 아닌 클레오의 삶이다. 박 사장은 스스로 하는 일이 거의 없고 남들이 해 주는 노동으로 삶을 지속하는 (즉 남에게 기생하는) 반면 클레오는 모든 노동을 스스로 하며 자신의 고용인인 주인집 여자의 하소연까지 들어 주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우리 설화 문학의 구조는 주인공이 반드시 역경에 부딪히고 그 역경을 스스로의 힘이든 혹은 조력자의 도움으로든 헤쳐나가는 게 원칙이다. 중국 문예 전통에는 ‘불평즉명(不平則鳴)’이란 말이 있는데, 당나라 문학가 겸 사상가 한유가 때를 못 만나 고생하는 벗 맹교를 위로하며 쓴 「맹동야에게 보내는 글(送孟東野序)」에서 처음 쓴 개념이다. ‘불평이 있어야 울게 된다’는, 다시 말하면 개인적으로는 불평·불만이나 자의식, 사회적으로는 구조적 모순이 있어야 그것을 고발하게 되고 그 결과 위대한 문학작품이 탄생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불평·불만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모순이 없는 사회가 어디 있겠는가. 그렇게 미루어 보면 위 말의 속뜻은 그런 현실을 직시해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게 아닐까.
그런데 인간의 삶이 이렇고 인간의 삶을 그려내는 문학이 이럴진대 정작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특히 인문학이 그러한데, 인문학(人文學, humanities)이란 인간과 인간의 근원문제, 인간의 사상과 문화, 인간이 살아가는 세계에 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즉 핵심은 ‘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란 것이다. 그런데 요즘 벌어지는 인문학 강의는 ‘인문학’이란 낱말 자체를 무색케 한다. 텔레비전의 인문학 강의는 예능과 구별이 안 된 지 이미 오래고 인터넷에서 소개하는 인문학도 인문학의 본디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본디 인문학(인간을 바탕으로 하는 학문)이라면 (자본을 근본으로 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대척점에 서거나 적어도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지금의 인문학 강의는 거꾸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는 법’에 치우칠 뿐이다. 

인문학이 제 역할을 못 하는 대표적인 사례가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모순된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말에는 겉으로는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으나 속으로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잘살고 있거나 적어도 잘살기를 갈구하는 교묘한 자기합리화가 숨어 있다. 자본주의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면 굳이 ‘인간적 자본주의’라는 형용모순으로 꾸밀 필요가 없을 것이고,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안주하고 있거나 안주하기를 바라는 욕구가 또한 자본주의를 ‘인간적’이라는 말로 꾸미게 했을 터다. 
인문학이란 독자를 불편하게 하고 성찰을 도와야 한다. 인문학은 단순히 지식의 나열이나 지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세계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비판적 사고(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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