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깨달음의 두레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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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깨달음의 두레박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6.10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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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 현
유 현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세계자연유산인 성산일출봉이 있는 성산포이다. 지난 50년대만 하더라도 수돗물이 공급되지 않아 아낙네들은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 올려 밥을 짓곤 했다. 
엉덩이가 위보다 좁은 두레박은 우물물에 닿으면 쓰러져 물속에 잠긴다. 그 두레박줄을 천천히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번갈아 잡고 힘들게 끌어올렸던 일이 문득 생각난다. 바닷가 마을이라 얕은 우물엔 소금기가 많아 식용에 부적합하기에 물맛이 좋은 깊은 우물가엔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두레박은 우물 안에서 깨질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 났다. 그 깨진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자 물은 반 넘게 새어 나갔다. 하지만 남아 있는 절반도 안 되는 물이라도 계속 길어 올려 허벅에 붓자 어느새 물이 가득 찼다. 
계·정·혜의 3학을 배우고 무학無學의 경지에 오르려는 노력은 깊은 우물에서 깨진 두레박으로 계속해서 정화수를 길어 올리는 일과 같다. 두레박은 쉬지 않고 부지런히 힘씀의 뜻을 가진 정근(精勤, appamāda)으로, 깨진 두레박은 게으름으로, 물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구성요소[七覺支]로 각각 빗대어 표현할 수 있을 법하다.
우리네 삶은 탐貪·진嗔·치痴의 3독毒으로 오염돼 있다. 흐르면 흐를수록 점점 더러워진다. 오염원이 가라앉은 깨끗한 물을 우물 밖의 물통이 넘치도록 계속 길어 올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어쩌면 여러 생을 윤회하면서 수행의 공덕을 쌓아야 하는 심오한 작업이기도 하다. 
출가사문도 아닌 재가자의 몸으로 수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뚫고 통과하기보다 어렵다. 두레박이 자주 깨진다는 것은 즐김과 달콤함에 빠져 나태해졌음이라. 이럴 땐 강력 접착제로 균열 부분을 땜질할 수밖에 없는데, 나에겐 독경이 그 역할을 한다. 
「마하왓차곳따 경」(M73)에서 부처님은 “출가 수행자들만 해탈을 성취하는 것은 아니다. 세속에 살면서도 다섯 가지의 족쇄를 끊고 또 다섯 장애를 이기고 고결하게 살아가는 재가불자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세 번째 성위聖位인 불래(不來, anāgāmin)의 과果를 성취한 이들이 많았느니라. 그들은 두 번 다시 이 사바세계에 돌아올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나에게 커다란 격려와 용기를 주는 법음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나라고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지 못할까 보냐? 우물 안에서 두레박이 깨진다고 뒷걸음질일랑 꿈도 꾸지 않고 불퇴전의 열의를 일으켜 아직 일어나지 않은 유익한 법들을 일어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정진을 하고 마음을 다잡고 노력한다. 
지난 1년간 깨닫기 목표 달성을 향한 두레박질은 개념(paňňatti)을 법(法, dhamma)으로 해체하는 수행이었다. ‘나’라는 개념적 존재는 오온으로, ‘일체 존재’는 12처로, ‘세계’는 18계로, ‘진리’는 사성제로, ‘생사문제’는 12연기로 각각 해체해서 보는 법안이 열린 것이다. 
이런 의욕(chanda)과 의도(cetanā)와 정진(viriya)의 에너지가 함께 모아지면서 자아니 인간이니 중생이니 영혼이니 우주니 하는 변하지 않는 어떤 불변의 실체가 있다는 착각이나 고정관념에서 해탈했다.  
세계를 공空으로 보려는 것이 반야중관의 직관적인 혜안이고, 세계를 깨달음의 입장에서 아름답게 꽃으로 장엄하여 보려는 것이 화엄의 종합적인 혜안이라면 초기불교는 세계를 법으로 해체해서 봄으로써 깨달음을 실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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