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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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6.24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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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천수(天水) 맥적산석굴(麥積山石窟) (3)
(사진 1)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78감 불좌상
(사진 1)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78감 불좌상

 

우리나라와 중국 불교 미술을 비교할 때 가장 아쉬운 것 중 하나는 유물의 양에 있다. 땅의 크기가 다르니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불교 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이민족의 침략이 많다 보니 제대로 남아 있는 것이 없어서 속상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중국 불적 순례를 하다보면 중국 불교 유물의 양에 애써 부러움을 표시하지 않으려고

(사진 2)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80감 보살상
(사진 2)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80감 보살상

하지만 내심 부러운 마음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어떤 유물과 견주어도 자랑할 만한 석굴암과 국보 78호와 83호 반가사유상 같은 뛰어난 유물이 있고, 인도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 드문 불국사, 부석사, 송광사, 법주사와 같은 산사들이 곳곳에 있기 때문이다. 자연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석굴을 만들려고 해도 중국처럼 만들 수 없다. 중국 석굴의 돌 재질은 대부분 모래가 굳어서 이루어진 사암 계통이다. 사암은 1970년, 80년대 주변에서 담장을 세울 때 사용한 모래와 시멘트를 섞어 사각형 틀에 넣고 꾹 눌러 압축하여 말린 시멘트 벽돌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그것보다 훨씬 입자가 고운 것이다. 물론 자연의 엄청난 힘으로 압축되었기 때문에 매우 견고하지만 돌 성분에 작은 모래가 많기 때문에 날카로운 것으로 파고 들어가기는 쉽다. 말 그대로 굴을 만들기에 적격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돌은 이런 사암보다 훨씬 단단하고 입자도 굵은 화강암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석굴을 파기도 어렵고 불상을 조각하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중국과 같은 석굴사원이 없는 대신 마애불을 만들었다. 백제의 서산 마애불, 경주 남산 곳곳에 새겨진 불상들, 고려시대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는 대흥사 북미륵암, 선운사 도솔암, 법주사의 마애불 등이 중국의 석굴사원을 대신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도 석굴사원이 없어서 아쉽다면 석굴암을 생각하면 된다. 석굴암은 화강암 판석을 이용해 석굴처럼 정교하게 건축한 것이다.

(사진 3)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121굴 보살과 비구상
(사진 3)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121굴 보살과 비구상

즉 자연적인 굴이나 파고 들어가면서 만든 석굴이 아니라 석굴처럼 건축한 공간에 부처님의 세계를 구현한 곳이다. 인도나 중국 사람들은 왜 그처럼 어렵게 굴을 만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불교는 외래에서 전래된 종교이고 함께 전해진 그 문화는 낯설고 궁금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 많은 승려들이 중국과 인도를 직접 가기도 했고, 거기서 전해진 수많은 책과 이야기는 장인들에게도 전해졌다. 특히 당나라 현장 스님이 쓴 대당서역기에 표현된 인도 사원의 모습과 중국을 다녀온 유학승들을 통해 들은 중국 석굴의 이야기는 장인의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최고의 건축 기술과 불심이 합해져 만들어진 걸작이 바로 석굴암이다. 이런 석굴암이 있기에 맥적산석굴의 압도하는 위용과 많은 불상을 보더라도 기죽을 필요가 없다.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각기 다른 문화를 보고 즐기면 된다.
맥적산에 만들어진 석굴과 불상은 북위시대부터 송대까지 이어지는데 그중 절반 정도는 북위 때 조성되었다. 그래서 맥적산 순례에서는 북위시대를 대표하는 불상과 그 다음 시대에 이어지는 불상들 중 잘 알려진 것들을 중심으로 둘러보면 된다. 혹시 다시 오기 어려운 곳이니 이참에 모든 것을 다 보자고 욕심을 부리면 맥적산을 나서는 순간 머릿속에는 보았던 불상들 대신 ‘야, 많이 봤다!’는 생각밖엔 떠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거기 갔다 왔다는 것밖엔 남지 않는다.

▲(사진 4)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121굴 보살과 비구니상
▲(사진 4) 북위시대 만들어진 제121굴 보살과 비구니상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순례 여행을 할 때 들리는 곳에서 무엇을 할 것인지 목적을 분명히 세울 필요가 있다. 어디에서 참선을 할 것인지, 어떤 불상이나 유적을 볼 것인지, 어디서 사진을 찍을 것인지 사전 공부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모나리자나 비너스상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그 옆에 서서 인증사진만 찍고 오는 셈이 된다. 
북위시대 불상들의 특징에 대해 학자들은 ‘수골청상(秀骨淸像)’형이라 한다. 빼어나 몸매에 해맑은 인상의 얼굴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려하면서 신체의 양감을 강조하는 당나라 불상과 비교해 소박하고 종교적 신비로움을 표현한 것을 그렇게 묘사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 한 예로 제78감의 정벽과 오른쪽 벽의 불상(사진 1)을 보면, 호리호리한 몸에 다소 각이 지긴 했지만 갸름한 불상의 얼굴에는 잔잔한 미소를 띠고 있다. 옷은 갈색천 조각을 녹색띠로 이은 가사를 입고 있는데 두툼하고, 도드라지게 새긴 불규칙적인 옷주름은 윈깡석굴 16~20굴의 형식과 비슷하다. 그래서 비슷한 시기인 5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본다. 제80감의 보살상(사진 2)은 전형적인 수골청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반개한 눈에 미소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보는 이의 마음도 편안해 진다. 이 보살상의 경우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지만 북위 말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121굴의 생동적인 보살과 비구, 비구니상(사진 3, 4)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어 행복해 한다는 느낌을 주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비슷한 미소를 머금게 만든다.   

(사진 5) 송나라 때 보수된 서벽 중앙의 마애불
(사진 5) 송나라 때 보수된 서벽 중앙의 마애불

 

맥적산석굴에서 조금 실망하게 되는 것은, 사실 기대가 컸기 때문이지 실망할 일은 아니지만, 멀리서도 조망할 수 있는 동벽과 서벽(사진 5) 중앙에 조각된 마애불의 모습이다. 굴 안에서 조각된 세련되고 우아한 불상들과 달리 아름답다기보다 기괴하다고 느껴지는 모습 때문이다.

(사진 6) 제165굴 송대 만들어진 보살상과 시자상
(사진 6) 제165굴 송대 만들어진 보살상과 시자상

이는 화강암처럼 단단한 돌이 아니라 사암 위에 짚, 말총 등 지푸라기를 섞은 찰흙으로 만든 것이어서 형상을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지만 외부에 노출되면 그만큼 비바람에 약하다. 그래서 송나라 때 보수하였는데 송나라 식으로 양감을 넣어 원래 불상이 지니고 있던 풍격이 사라지고 이상한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송나라 얘기가 나왔으니 송나라 때 만들어진 제165굴의 보살상과 시자상(사진 6)을 보면, 오른쪽의 시자상은 이전의 호리호리한 몸에 갸름한 얼굴을 지닌 상들과는 달리 살집이 많은 보통 여인의 모습처럼 표현되었다. 사실 송나라 불교가 세속적인 경향으로 바뀌면서 불상도 이상적인 모습보다는 사실적인 모습으로 바뀐다. 눈매가 날카롭지만 그 외에는 보통 여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러한 시기에 거대한 불상을 보수했으니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바뀌는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불교미술을 공부하다보니 자꾸 불상을 예술품으로 뜯어보려고 해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윈깡석굴이나 룽먼석굴의 큰 불상에서 받았던 느낌을 맥적산 마애불에서 느껴지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그 당시 살았던 신심이 돈독한 불자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나라 시골 곳곳에 만들어진 미륵불이나 관촉사의 거대한 미륵보살상을 보면서 불자들은 부처님의 미추나 그 불상이 어떤 불상인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부처님이 거기 계시다는 사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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