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사람에게도 값이 매겨져 있었다 - 입지(立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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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람에게도 값이 매겨져 있었다 - 입지(立旨)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6.29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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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제주학 - 문창선 선생이 들려주는 제주의 고문서 이야기 ①

고문서는 과거 선인들의 삶의 단면이다. 그런 점에서 고문서는 가감 없이 당시를 드러내준다. 그래서 고문서는 점점 더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군다나 제주의 고문서는 육지부와는 색다른 질감을 보여주며, 우리 제주의 과거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본지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인 문창선선생의 도움으로 제주 고문서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요즘 개념으로서야 사람에게 소유권을 매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겠지만 조선시대 노비들이나 그들의 노동력, 계집종의 낳은 자식들까지 모조리 사적인 소유대상이었고 재산증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자원 중 하나였다. 제주라고 예외일 수 없는데, 노비를 거래하는 문서나 그와 관련된 고문서들은 제주에서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심지어 육지의 노비들을 사오는 경우도 흔했으며, 그 와중에 요즘의 브로커처럼 중개하는 이들도 있었다. 
내용에 따르면, 일단 안복(安卜)이라는 인물이 계집종 족생(足生)을 둘러싸고 강희보(姜熙寶)라는 인물과 거래를 벌이고 있다. 정미년이 언제 적 정미년인지 확인이 불가하다. 강희보라는 사람은 계집종 족생의 소유주로 보인다. 안복이라는 인물이 이 집의 계집종 족생의 일 년치 몸값을 치루고 있다. 이로보아 안복이라는 인물은 이 집의 족생이라는 계집종을 맘에 두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둘은 살림을 따로 차려나갔던 모양이고, 당연히 주인집의 계집종을 데리고 살았으니 그녀의 일 년치 몸값을 지불해야만 했다. 몸값을 지불하는데 있어서 돈을 지불했다는 공증이 필요했을 것이다. 왼쪽 맨 끝에 ‘使’라고 쓰인 것은 제주목사라는 뜻이고, 밑에 알아볼 수 없게 휘갈긴 글씨는 수결(手決)이라하는데, 이 사실을 확인했다는 제주목사의 사인이다. 이처럼 어떤 사실을 관청에 등록해 공증하기 위한 문서를 입지(立旨)라고 부른다. 
  참고로 이 계집종의 일 년치 몸값,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연봉은 밭벼 4섬 2말이었다. 보통 한 섬은 한사람의 일 년치 식량으로 계산하니, 네 섬이니 적지 않은 양이다. 한 끼를 7,000원으로 계산하면 하루 2만원 남짓, 한 달에 60만, 일 년 720만 정도이니, 그녀의 당시 연봉은 요즘 식으로 치면 연봉이 최소 3,000만 이상이었던 셈이다. 

 

[원문]
丁未十二月二十六日役價磨鍊
寺奴安卜亦姜熙寶戶婢
足生十二朔容隱役價
田米肆石貳斗
使(手決)

[번역]
정미년 12월 26일 역가(役價)를 마련함
시노(寺奴) 안복(安卜)이 강희보(姜熙寶)의 
호비(戶婢) 족생(足生)의 12개월 용은 역가(役價) 
밭벼 4섬 2말을 마련함.
목사(수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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