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④ - 코로나19와 기본 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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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④ - 코로나19와 기본 소득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1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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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지난 4월 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지방정부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한 데 이어 5월엔 중앙정부 역시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했다. 긴급재난지원금으로 우선 급한 불은 끈 듯 보인다.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이 실시한 ‘소상공인시장 경기동향조사’에 따르면 지난 5월 소상공인 체감경기 지수는 88.3, 전통시장 체감경기 지수는 109.2로 지난 4월보다 각각 14.5%, 29.2%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한국은행이 5월 26일 발표한 ‘5월 소비자동향조사 결과’에 따르면 5월의 소비자심리지수(CCSI)는 77.6으로 4월보다 6.8%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문제는 코로나19 격리 해제자의 증가수보다 확진자의 증가수가 더 많은, 즉 갈수록 코로나19 확진자가 늘어나는 추세에 있는 상황에서 긴급재난지원금이 상시적 지급이 아닌 한시적 지급이라는 데 있다. 또한 이번 경제 위기는 코로나19로 인한 것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가 노쇠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기본 소득’이 다시 고개를 드는 까닭이다. 
기본 소득이란 정부가 모든 개인에게 자산 조사와 노동에 대한 요구 없이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소득이 있건 없건 자국 구성원들에게 일정 정도의 돈(소득)을 지급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 때 민주당 후보경선에서 이재명 후보와 김부겸 의원이 기본 소득 제도를 공약으로 내걸었으며, 코로나19가 장기화함에 따라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워런 와거의『인류의 미래사』에는 “‘주(share)’로 알려진 ‘평등한 개인 수입’”이란 게 나온다. ‘주’는 2044년에 벌어진 (책에서는 ‘대재앙’이라 표현되어 있는) 제3차세계대전 이후 초토화된 지구에서 ‘세계당(World party)’의 정책 가운데 하나다. 모든 구성원은 “노동의 종류에 관계없이” 공공의 부 한 ‘주’씩 균등하게 배분받는데, 노동 의지에 따라 한 ‘주’ 또는 2분의 1‘주’를 받고, 개인 사정에 따라 2분의 1‘주’ 또는 4분의 1‘주’를 추가로 받게 된다. 처음에는 각자가 속한 지역의 부에 따라 가치가 매겨지지만 나중에는 세계 수입에 따라 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말 그대로 ‘인류의 미래’에만 가능한 일일까. 1928년 케임브리지 대학생을 상대로 한 강의에서 케인즈는 “자본주의가 현재 상태로 부의 축적을 지속하고 생산력이 발전하면 대략 한 세기 후면 모든 사람이 주 15시간만 일하고도 충분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로부터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은 지금의 생산력은 케인즈의 예언대로 주15시간만 일하고도 모든 사람이 부족함 없이 먹고 살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자본가들은 이윤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기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지원해도 기업은 더 이상 노동자를 고용하지 않는다(4월 22일 열린 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정부는 기업에 총 235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기업이 어려우면 정부가 지원을 해 주지만 기업은 거꾸로 노동자를 해고한다. 해고당한 노동자는 겨우 몇 달 정도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을 뿐이다. 실업자는 스펙이 부족해서 취업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더 많은 잉여가치를 획득하고자 더 적은 노동력만을 고용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자본가가 필요로 하는 노동력보다 많은 과잉노동력인 것이다.
한국이 다른 국가들보다 코로나19 방역을 조금이라도 잘한 ​까닭은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과 성숙한 시민의식 때문이었다(이건 정부도 인정하는 것이고, 이번만큼 정부의 말이 진정성 있게 다가온 적도 없었다). 해마다 일어나는 (사실은 인재일 수밖에 없을) 자연재해 때도 정부의 재난 대책은 시민들의 성금을 반드시 필요로 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 때도 그 극복을 위해선 ‘국민 금 모으기 운동’이 필요했다. KBS에서 일상적으로 펼쳤던 국민성금운동이 있었고, 그 뒤 (장애인을 위한) 후원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이젠 포털사이트에서도 그런 후원 운동을 하고 있다. 이것이 국민이 성금으로 해결할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정책으로 해결할 일인가. 
언제부터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불쌍하다’는 말을 적어도 사람에게는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불쌍한 존재가 아니라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그 뒤 차츰 인간은 동정이나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간은 동정이나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누려야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정부가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 또한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지급하는 기본 소득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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