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륵해서 노비신분에서 풀어주노라 - 방량기(放良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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갸륵해서 노비신분에서 풀어주노라 - 방량기(放良記)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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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제주학 - 문창선 선생이 들려주는 제주의 고문서 이야기 ②
문창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문창선(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앞에서도 말했지만 조선시대에서의 노비란 요즘 같은 개념이 아니라 소유물에 불과했다. 이런 신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이 속량(贖良)이었다. 속량이란 국가 또는 주인에게 공을 세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제도이다. 당시 속량의 방법을 보면 상전(上典)에게 속가(贖價)를 지불하고 속량되는 경우, 부모가 노비 신분인 자손의 속량을 위하여 속가를 바치는 경우, 자식이 노비 신분인 부모를 위하여 속가를 지불하는 경우, 노비가 주인에게 충성스럽게 봉사한 공으로 방량(放良)되는 경우, 전공(戰功)으로 방량되는 경우, 노비가 자신을 대신할 노비[代奴婢]를 들이고 신역(身役)에서 벗어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이 속량을 노비주의 입장에서는 방량(放良)이라고 한다. 방량기(放良記)란 말 그대로 자신이 소유로 되어있는 노비를 양민[良]이 되게 놓아주며[放] 그런 사실을 기록[記]으로 남겨 증거로 삼게 해준다는 말이다. 이런 형식의 문건은 우리나라를 통틀어 거의 발견된 경우가 없을 정도의 매우 귀한 문서에 속한다. 
제주목사를 역임했던 이형상은 청백을 실천한 목민관이자, <병와집>·<강도지>·<악학편고> 등의 저술을 남겨 실학의 원류로까지 평가받는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그의 문집 <병와집>에는 집안의 노비 선일(先一)을 양인으로 삼아 해방할 때 직접 작성해준 문권이 수록돼 있다. 이 글에 따르면 이형상은 노비와 주인의 관계를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은 종의 직분이고, 그 공로에 보답하는 것은 주인의 권한’이라는 말로 정의하고 있다. 이형상은 방량(放良)을 통해 선일에게 자유를 줬다. 그때 그는 복마 1필을 지급해 살림 밑천으로 삼게 하는 한편 방량 사실을 증명하는 문권을 친필로 작성했다. 그런데 얼마 전 제주에서도 이런 문서가 발견되었다.

▶속량이란 국가 또는 주인에게 공을 세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제도이다. 방량기란 노비에서 풀어주는 조선시대 문서이다. 최근에 발견된 이 문서는 도광 7년(1827) 12월 초7일 노비 차석(次石)에게 주는 방량기(放良記)이다.
▶속량이란 국가 또는 주인에게 공을 세워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양인(良人)이 되는 제도이다. 방량기란 노비에서 풀어주는 조선시대 문서이다. 최근에 발견된 이 문서는 도광 7년(1827) 12월 초7일 노비 차석(次石)에게 주는 방량기(放良記)이다.

 

[원문]
道光七年十二月初七日 奴次石處 放良文
右放良事段戶奴次石其父爲儒生之故一
動一靜之際依俙有承襲之氣像而凡諸
使喚也少無欺紿全以忠直爲事可見其
情之所在而且 親山所植松養山處以高山
所致築墻防塞極爲難堪之際奴次石率
其四子忘勞趨役一面數百步許築墻全
爲擔當大抵其忠也盛也功也尤極嘉奇
其在揚善之道豈無褒賞之理乎同次石身
乙特爲放良爲去乎日後以此憑考事
上典(手決)

[번역]
도광 7년〔1827〕 12월 초7일 노비 차석(次石)에게 주는 방량기(放良記)
이 방량기의 내용은 호노(戶奴) 차석(次石)은 그 아비가 유생(儒生)이었기에 거동(擧動)할 때 어렴풋하게 아비에게서 물려받은 기상이 있었으니, 무릇 여러 일을 불러 시켜봤더니 조금도 거짓됨이 없이 전적으로 충직만을 일로 삼았으니, 그에게 정(情)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또 부모의 산소 주변 나무를 심고 산을 보호하는 곳에 산이 높아 담 쌓아 방색(防塞)하기를 어려워하던 차에, 노 차석이가 네 아들까지 데리고 한 면이 수 백보나 되게 담쌓기를 전적으로 도맡아했으니 그의 충직함과 정성 그리고 공이 너무 갸륵하고 훌륭하다. 마땅히 선행을 드높여야 하는데 어찌 포상하는 도리가 없을 수 있겠는가? 위 차석이를 특별하게 방량해주고 있으니, 나중에는 이 글로 하여금 증거로 삼도록 하라.
상전(수결) 

물론 속량(贖良), 돈을 받고 풀어주는 경우는 육지부나 제주나 흔한 편이지만 자신의 소유였던 노비를 기특하게 여겨 풀어주는 경우는 육지부에서도 매우 드문 일이다. 이 문서는 제주에서 발견되었는데, 제주지역은 육지부에 비해 주종관계가 너무 타이트하지 않고 좀 느슨한 편이었다. 가령 제주지역의 경우, 노(奴)와 양녀(良女)가 혼인한 사례가 호적중초(戶籍中草)에 많이 보인다. 따라서 신분이 양인으로 변동되는 사례가 많으며 유동성이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서 안에는 처소격(~에게)이 많이 사용되는데, 자신보다 신분이 위인 사람에게는 ‘전(前)’, 동등한 경우엔 ‘처(處)’ 그리고 아랫사람에겐 ‘아해〔良中〕’라고 일반적으로 쓰는데, 위 문서의 경우 ‘처(處)’라고 하여 차석이를 존중해주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또한 조선시대는 ‘종모주의(從母主義)’를 따랐으니, 차석이 신분도 부(父)를 따르지 않고 모를 따라 노(奴)가 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서는 하나의 계약서에 불과하고, 이를 가지고 관(官)에 가서 입안(立案)을 발급받아야만 신분의 이동을 공증 받을 수 있었는데, 그 이후의 사정은 알 수 없다. 여기에도 마지막엔 노비를 풀어주는 상전(上典)이 상전이라 쓰고 자신의 사인인 수결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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