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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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08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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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 병령사석굴(炳靈寺石窟) (1)
(사진 1) 병령사 석굴
(사진 1) 병령사 석굴

맥적산 석굴이 있는 천수에서 차로 6시간 정도 서쪽으로 가면 감숙성의 성도인 난주(蘭州)가 나온다. 난주에는 황하의 상류를 막은 높이 148미터의 유가협댐이 있는데, 여기서 만들어진 전기가 인근 지역에 공급된다. 댐은 자연스럽게 엄청난 크기의 인공호수를 만들었는데 우리나라 소양강 댐이 만든 호수의 두 배 정도 크기이다. 난주 인근에 있는 대표적인 불교 유적지가 영정현(永靖縣)의 병령사(炳靈寺) 석굴이다. 유가협댐이 건설되면서 상류 지역이 수몰되어 지금은 병령사 석굴 앞까지 물이 차있다(사진1). 그래서 난주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병령사 석굴 선착장(사진2)까지 간다. 쾌속정으로 50분 정도 거리인데, 배를 운전하는 선장이 중앙으로 똑바로 운전하지 않고 좌우로 바꿔가면서 배를 모는데 왜 그러냐고 물어보니 물 아래에도 길이 있어 암초를 피해 운전한다고 했다. 병령사 석굴에 가까워지면 갑자기 주변 경관이 바뀌어 깜짝 놀란다. 울퉁불퉁한 거대한 봉우리들이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황하석림(사진3)을 마주 하면 넋을 잃지 않을 수 없다. 그 한 끝에 병령사 석굴(사진4)이 자리하고 있다.      

(사진 2) 병령사 석굴 선착장
(사진 2) 병령사 석굴 선착장

명나라 때 오승운이 쓴 소설『서유기』는 당나라 승려 삼장법사가 당 태종의 명으로 천축에 가서 불경을 구해 오는 이야기이다. 천축으로 가는 도중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을 만나 함께 81가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황제의 명을 완수한다. 천궁에서 소란을 일으킨 죄로 하계에서 형벌을 받고 있는 손오공이 워낙 천방지축이어서 삼장법사는 손오공의 머리에 고리를 씌워 제멋대로 굴지 못하게 한다. 불심은 깊지만 다소 어수룩하게 그려지는 삼장법사는 당나라 때 인도를 다녀온 후 자신이 가지고 온 많은 경전을 번역한 현장(玄奘, 602~664)스님이 그 모델이다.    

(사진 3) 병령사 석굴 가는 길 - 황하석림
(사진 3) 병령사 석굴 가는 길 - 황하석림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 의하면 현장법사의 속가에서의 성은 진(陳)이며, 하남성 개봉 인근의 진류현 출신이다. 증조부와 할아버지가 관리였으나 아버지는 나라에서 벼슬을 내려도 거절하며 유교 경전만 공부한 학자였다. 현장스님은 네 명의 아들 중 막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난 현장은 10세 때 출가한 형을 따라 낙양의 정토사에서 불경을 공부했고, 13세 때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을 대중 앞에서 설법하기도 했다. 이후 장안을 거쳐 촉의 성도로 가서 경론과 율을 공부한다. 20대가 되면 형주, 상주, 조주 등 여러 곳을 다니면서 고승들로부터 배운 후 다시 장안으로 간다. 여러 곳에서 대덕, 고승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으나 종지를 그대로 해석하는지 의혹을 갖게 되었고, 직접 인도로 가서 경전을 가지고 와서 의혹되는 부분을 풀기로 다짐한다. 하지만 당시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당나라는 국경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아서 국경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동료들과 함께 인도로 가고 싶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이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포기하였으나 현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혼자라도 떠날 것을 결심하고 마침내 629년 가을에 길을 떠났으니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다. 

(사진 4) 우기 때 물이 찬 병령사 석굴 모습
(사진 4) 우기 때 물이 찬 병령사 석굴 모습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그의 여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현장은 당시 맥적산 석굴이 있는 천수 출신인 효달(孝達)이라는 승려가『열반경』을 공부하고 고향인 천수로 돌아가려 한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장안을 출발한다. 천수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 현장은 거기서 난주 사람을 만나 그를 따라 난주에 간다. 하룻밤을 묵은 후 말을 끌고 무위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 그와 함께 무위에 들어간다. 거기서 한 달 가량을 머무르며 그곳의 승려와 속인들에게『열반경』,『섭대승론』및『반야경』을 강의했다.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에는 현장이 병령사 석굴을 방문했다고 기록되지는 않았다. 당나라 때는 병령사를 용흥사(龍興寺)라고 불렀는데, 그런 절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인도로 갈 수 있을지 어쩔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다 책 내용이 서역을 둘러본 기록이기 때문에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중국 절에 대한 얘기를 굳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병령사 석굴이 있는 영정현은 서쪽으로는 하서주랑에 접하고 동쪽으로는 장안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나가거나 들어오는 상인과 승려들은 대부분 그곳을 지나갔다. 현장보다 훨씬 전에 인도를 다녀온 법현스님도 이 길을 통해 인도로 갔고, 현장보다 후에 인도를 다녀온 신라의 혜초스님도 이 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 왔다. 그렇다면 현장도 병령사 석굴을 들렸을 것이다. 만일 현장이 서역으로 가다 병령사 석굴에 들렸다면 병령사에서 가장 대표적인 굴인 169굴(사진5)에 있는 장안에서 보았던 불상들과는 다른 모습의 불상을 보고 과연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물론 당시 병령사는 지금 당나라 때 만들어진 굴들이 없는 훨씬 작은 규모였을 것이다. 

(사진 5) 서진 때 만들어진 제169굴 입구와 당나라 때 만들어진 대불
(사진 5) 서진 때 만들어진 제169굴 입구와 당나라 때 만들어진 대불

 

이 병령사 석굴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우리나라로 치면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활약하던 시기에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서진(西秦) 때부터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송을 거쳐 청나라에 이르기까지 1,500년간 계속 만들어졌다. 현재까지 알려진 석굴 수는 총 216개, 불상은 815구이다. 이 석굴의 이름은 처음에는 당술굴(唐述窟), 당나라 때 용흥사, 송나라 때는 영암사(靈巖寺)로 불리다 명나라 때 티베트어로 천불동, 만불동을 뜻하는 ‘십만불주(十萬佛洲)’를 음차한 병령사로 불리게 되었다. 
맥적산 석굴에는 북위시대 불상들이 많은 반면 병령사 석굴에는 당나라 때 불상들이 많다. 그리고 맥적산 석굴에서는 많은 불상들이 굴 안에 만들어져 있는데 병령사에서는 작은 감들과 마애불상들이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가에 쭉 줄지어 있어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병령사에서 현장스님이 보았을 거대한 절벽에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제169굴과 아기자기한 굴들이 있는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 보면 답사가 훨씬 즐거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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