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은(市隱)이던가? 도심 속 유서 깊은 광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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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은(市隱)이던가? 도심 속 유서 깊은 광명사
  • 이진영 기자
  • 승인 2020.07.08 14: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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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신문 30주년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한국불교태고종 광명사 (주지 일향 스님)
도심 속 유서 깊은 광명사
도심 속 유서 깊은 광명사

 

인터넷지도에서 위치를 검색하여 확인하고 나왔는데, 근처를 아무리 차로 돌아봐도 사찰처럼 보이는 건물은 없었다. 약속한 시간은 다 되가는데 난감한 노릇이었다. 내심으로는 사찰이야, 건물의 외형이 워낙 특이해 근처에 가기만하면 금방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던 탓이다. 결국 길가는 사람에게 물어가며 찾아낸 광명사(주지 일향스님)는 과연 그럴만했다. 스스로 자책할 필요가 없는, 광명사는 아무 생각 없이 걷다보면 지나치기 쉬운 위치에 숨어있었다.

광명사 주지 일향스님
광명사 주지 일향스님

 

시청 한 블록 뒤, 차로에 건물과 건물사이 좁은 대문이 보였다. 배꼼 열린 문을 열고 들어서니 바로 대웅전 앞마당이다. 첫인상은 마치 시골집에 발을 들인 듯 편안했다. 여느 가정집 구조 그대로인데, 이층구조의 사찰이 맞아준다. 건물들이 사방을 두르고 있어서 답답함을 느껴야 하는데, 오히려 아늑하고 편안하다. 일향주지스님은 대웅전 앞마당에서 기자를 맞아주었다. 마당 한편 향봉당 수명(守明) 대화상의 비 음면에는 한문과 한글 혼용으로 광명사의 내력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주지스님의 조부인 수명스님은 1927년에 태어나 15세에 불문에 귀의하고 1954년 원당사에서 동산선사를 은사로 수명이라는 법명을 받았으니, 이 도심 속에 숨어 앉은 조그만 광명사의 3대를 물려 내려오는 이력은 만만찮은 것이다. 더군다나 불상만 모신 상태로 내려오던 빈 사찰을 인수해 지금의 광명사를 창건했다하니, 이력은 훨씬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야할 듯하다.

대웅전 마당
대웅전 마당

 

1층은 요사채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었고, 대웅전은 2층이었다. 석가모니부처님 좌우로 대세지보살과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었는데, 스님은 석가모니부처님의 상호가 매우 좋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면서 관련된 일화까지 들려주었다. 개금불사를 하려는데 상호가 너무 원만하여 차마 손댈 수 없었다는 내용이었는데,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좌우협시보살은 목조였는데, 그래서인지 금칠 안에 감춰진 느낌이 부드럽고 따뜻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전에 참배하고 탱화를 살펴보려고 다가서니 거기서 조그맣고 특이한 불상 2개를 발견했다. 스님에게 질문해보았지만, 스님 역시 언제 누구에 의해 모셔졌는지 아는 바가 없다고만 했다. 그저 모셔져 있던 것이니 무슨 사연이 있겠지 싶어 그대로 모신다는 것이었다. 특히 돌에 조각을 붙여 금칠로 마감한 듯 묵직한 부처상 앞에서 한참을 서성거렸다.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대웅전을 나와 1층 요사채로 자리를 옮겨 향했다. 

광명사 소장 小금동불상
광명사 소장 小금동불상

-이곳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매다 겨우 찾았습니다.
-(웃음) 대부분이 다 그래요. 아무생각 없이 지나치기 딱 좋습니다. 

-들어서니 매우 아늑합니다. 사방이 다 건물인데, 오히려 답답하다는 느낌보다는 편안합니다. 중국 위진 시대 도연명(陶淵明)이 남산에 은거했다는데, 마치 그런 느낌입니다. 실제로 은거의 경지 중 두 번째가 저잣거리에 숨어사는 시은(市隱)이라던데요. 도심 속에 있지만 도시와는 동떨어져 있다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웃음) 그렇습니까? 아마 일반 가정집 구조를 사찰로 꾸려서 그런 느낌이 들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도심 속 한가운데 사찰이란 일장일단이 있습니다. 좋은 것은 접근성일 텐데요, 나머지는 글쎄요, 별로 좋은 일은 따로 없고요, 이따금 취객들의 난입과 소동을 감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웃음)

-(재미있게도 스님 곁에는 도연명을 그린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런데 글씨체가 조금 이상했다) 이 그림과 글씨는 뭔가 좀 이상한데요, 행서로 쓰인 화제가 이상합니다. 
-이 그림은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바늘로 한 땀 한 땀 뜬 수예작품입니다. 큰 스님이 입적하기 전에 어느 보살님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일이 있었는데, 그 이가 갚을 능력이 없다며 직접 이렇게 떠서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막은 저도 모릅니다. 

 

광명사 소장 小금동불상
광명사 소장 小금동불상

-각종 행사에 음성공양을 펼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연화합창단이 광명사 소속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또한 스님께서는 태고보현봉사단의 지도법사까지 맡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이 단체는 여러모로 스님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알고 있는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태고보현봉사단(단장 박두화)은 저의 아버님인 월현당 성관스님이 초대 지도법사를 지낸 인연이 있습니다. 이제 제가 지도법사를 맡고 있습니다. 이번에 20주년 행사를 기획했었는데, 코로나19로 인해 기념법회로 대신할 수밖에 없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연화합창단(단장 오수민)은 우리 광명사에 언제나 새롭고 신선한 기운을 불어넣어주는 소중한 불음봉사 신행단체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제주의 불자들은 웬만해서는 다니던 사찰을 바꾸지 않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여기도 그럴 것이라 짐작되는데, 어떻습니까?
-말씀드린 대로, 3대째 이 자리에서 불법을 펼쳐왔기 때문에 짐작하시는 대로 저가 어릴 때부터 뵙던 보살님들이 많습니다. 낮 익은 보살님들 앞에서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긴장했던 처음이 생각납니다. 지금에야 시간도 많이 지나고 해서 이제는 서로 스님과 보살로 편안히 불법을 나누고 있습니다.

-스님이 생각하고 계신 앞으로의 광명사가 궁급합니다. 
-간혹 번잡스런 이곳을 떠나 조용한 곳에서 사찰을 짓고 싶다는 생각이 가끔 들기도 하지만, 그간의 인연들이 있어서 그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이곳을 좀 더 확장하자니 주위 건물들 매입 여건들도 만만찮은 일이더군요. 그래서 지금은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예전 인연들을 소중하게 여기며 내실을 다져야 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광명사가 좀 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면 이곳이 도심 한가운데니깐 어떻게든 이 구도심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과 협시 보살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모니 부처님과 협시 보살

 

일주문을 빠져나와 밖에서 안쪽을 향해 셔터를 한 번 누르고 돌아서 나오는 길에서부터 기사를 작성하는 지금까지 그 조그마한 불상이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아마 상(相) 이전의 상(相)을 느껴 그런 것이 아닌지? 그러니 나는 아직도 형상에 갇혀 사는가 보다. 눈 밝은 이들이여, 광명사에 들러 이 조그만 불상을 일관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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