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⑤ - 다시 읽은『어린 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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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⑤ - 다시 읽은『어린 왕자』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15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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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얼마 전 독서 모임에서 생 떽쥐베리의 『어린 왕자』를 오랜만에 다시 읽었다. 이번으로 아마도 세 번째(혹은 네 번째?) 읽은 듯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고등학교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점심시간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그 날로 다 읽고 나서 내 가슴은 뭔가로 벅차올랐던 것 같다. ‘네가 날 길들인다면 네 금발을 닮은 밀밭을 지나가는 바람 소리를 좋아하게 될 거야’라든가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란 구절은 당시 외사랑을 앓고 있었던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렸다. 또 ‘네 장미가 그다지도 소중한 이유는 네 장미를 위해 잃어버린 시간 때문이야.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이 있는 거야’ 하는 구절은 어떤가. 당시 이 구절들을 연애편지에 인용하기도 했다. 
그 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는지 졸업하고 나서였는지, 생 떽쥐베리 전집을 두 권이나 샀다. 물론 책 속엔 『어린 왕자』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때 어떤 느낌으로 읽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리고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얼마 전 다시 한번 읽었고, 다 읽은 뒤 또다시 읽고 있다. 책이란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전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들이 새록새록 눈에 띄는 법. 고등학생 때 읽은 것은 ‘길들이기’나 ‘기다림과 설렘’, 그리고 ‘길들인 것에 대한 책임’ 들뿐이었던 데 비해 중년인 지금은 ‘어른들은 눈으로 세계를 보고 아이들은 마음으로 세계를 본다’거나 ‘어른이 되면 왜 어떻게 변하는가,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인가?’라는 좀 더 본질적인 의문을 품게 되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가장 중요한 의문은 ‘길들인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할까?’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상대방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 여우의 말처럼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녀)에게 길들여졌다면 그(녀)의 머릿결 냄새로부터 그(녀)와 자주 갔던 찻집이나 여행지, 함께 봤던 영화 들까지 좋아할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냄새가 좋고 차가 맛있으며 여행지가 근사하고 영화가 재밌어야 하는데 오로지 그(녀) 때문에 그것들이 좋아진다면 주객이 뒤바뀐 셈이다. 그래서 그(녀)가 싫어지거나 좋지 않게 헤어지게 되는 날이면 ‘머릿결 냄새’와 ‘찻집’과 ‘여행지’와 ‘영화’까지 죄다 꼴도 보기 싫은 지경에 이르게 된다(혹, 그것들을 추억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 또한 감상적인 되새김질에 지나지 않는다). ‘냄새’와 ‘찻집’과 ‘여행지’와 ‘영화’가 무슨 죄란 말인가.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말 그대로 단지 그(녀)에게 길들여졌을 뿐인 것이다. 
누구나 행복하기를 원하고 각자가 추구하는 행복은 저마다 다르다. 돈, 명예, 가족, 일, 건강……들. 그러나 행복한 주체는 누구나 자기 자신이기를 원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한 것도 물론 기분 좋은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 자신이 행복해야 한다. 그런데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길들이기’를 바탕으로 하면, 내가 스스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나를 길들인 사람의 행복한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꼴이다. 내 삶의 주인은 나인데 왜 다른 이가 행복해야만 내가 행복해지는가. 뭔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뒤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개인] 홀로 존귀하다)”이라고 외쳤다. 이는 인간은 그 무엇에도 훼손당해서는 안 되는 존엄성을 지녔다는 의미이기도 하거니와 자기 삶의 주체로서 신이나 돈, 계급을 포함한 그 어떤 것에도 종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간 해방 선언이다. 성경에는 ‘누가 오 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 리를 같이 가 주어라’든가 ‘겉옷을 달라거든 속옷도 내주어라’란 가르침이 있다. 누군가가 오 리를 가자고 해서 따라가면 내가 그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이지만 도리어 ‘십 리를 가 줄게’ 하면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또한 누군가가 겉옷을 달라고 해서 벗어 주면 내가 그 사람에게 종속되는 것이지만 도리어 ‘속옷까지 줄게’ 하면 내가 내 행동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주인 자리를 다른 것에 내주고 자신은 종으로 살고 있다. 우선 지금 사회 체제는 인간이 근본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돈이 근본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라서 대개의 인간은 돈을 주인으로 섬기며 자신은 노예로 살고 있다. 또한 타인에 종속된 삶을 살고 있다. 하루종일 타인과 더불어 살아가며 자신과 맞지 않은 사람으로 인해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난다. 타인으로 인해 내 기분이 좌우된다면 나는 그에게 종속된 것일 따름이다. 그래서 수행도 하고 기도도 한다. 삶의 관점을 바꾸기 위해서! 돈, 권력, 성공, 경쟁에 길들여진 삶에서 벗어나 인간, 자유, 고독, 연대를 추구하는 삶으로 바꿔야 한다. 그것이 생 떽쥐베리가 『어린 왕자』를 통해 우리에게 말하는 바일 것이다. 고작 ‘길들이기’ 따위가 아닌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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