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 순교승 열전[1] - 순교 455주년, 제주에서 입적한 허응당 보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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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순교승 열전[1] - 순교 455주년, 제주에서 입적한 허응당 보우대사
  • 안종국 기자
  • 승인 2020.07.15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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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우대사 영정
보우대사 영정

 

올해는 조선중기 불교중흥에 큰 족적을 남긴 허응당 보우대사(虛應堂 普雨, 1509~1565)가 제주에 유배와서 순교한지 455주년이 되는 해이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보우대사는 1565년(명종20) 7월 7일 조천포로 들어와 8월말경 현재 제주시 애월읍 어도봉 근처에서 제주목사 변협(邊協)의 독수(毒手)에 의해 입적한 것으로 전해진다.  
보우대사는 저 멀리 절해고도(絶海孤島)의 척박한 땅 제주에서 몰지각한 한 관료의 몽둥이에 맞아 눈을 감으면서 남긴 임종게(臨終偈)에서 50평생을 이렇게 탄(嘆)했다.

幻人來入幻人鄕   五十餘年作戲狂   
弄盡人間榮辱事   脫僧傀儡上蒼蒼   

허깨비가 허깨비 마을로 들어와
오십년 넘도록 미친 짓 하였구나
인간 영욕의 일을 다 희롱하고서
중의 탈 벗고 푸른 하늘로 올라가노라

유자(儒子)들의 순혈을 자부하며 등장한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을 개국하자마자 불교탄압에 앞장섰다. 사찰은 대부분의 재산을 몰수당하고 불경을 불온한 것으로 치부했다.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에서 ‘허무적멸지도(虛無寂滅之道)’라며 불교를 혹세무민의 불온한 사상으로 몰아세웠고, 도첩제 또한 폐지돼 유능한 인재들이 불교로 유입되는 통로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조선 중기, 신진사대부들은 사찰에서 고기와 술을 요구했고 사찰 재물을 태우고 보물을 약탈했다. 사찰을 폐사시켜 조상의 묘지로 사용하기도 했다. 사찰에 불을 지른 유생이 영웅처럼 떠받들어졌고, 스님들을 군대에 강제 편입했으며, 불상과 범종은 녹여서 무기로 만들었다. 스님들은 천민으로 전락했다. 신분하락뿐만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는 죄목으로 구형을 받거나 잔인하게 처형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불교는 이제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할 불온한 사상이었다. 스님들은 더 이상 조선의 백성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불교의 명운은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문정왕후(文定王后, 1501~1565)였다. 조선 11대 왕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는 12살에 왕위에 오른 13대 왕 명종의 모후(母后)였다. 수렴청정을 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문정왕후는 불심이 매우 깊었다. 중종이 폐불을 단행할 때도 왕실의 재산을 관리했던 내수사(內需司)를 통해 여러 사찰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문정왕후는 불교가 살아야 나라가 살고, 왕권이 강화돼 나라가 안정된다고 확신했다. 왕후는 인수사(仁壽寺)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불사 계획을 세웠다. 그때 바로 금강산 일대에서 명망이 높았던 허응 보우(虛應 普雨, 1509?~1565) 스님을 만나게 된다.
보우 스님은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여덟 살부터 양평 용문산에 입산해 행자시절을 보냈다. 15세 무렵 견성암 지행(智行) 스님의 지도로 금강산 마하연에서 머리를 깎았고 이후 10여년을 금강산 이암굴에서 머물며 강학과 수행에 몰두했다. 

조천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 조성된 보우대사 석상
조천 평화통일불사리탑사에 조성된 보우대사 석상

 

유불선 3교에 밝았던 스승 덕에 스님은 불교를 비롯해 유교까지 폭넓게 섭렵했고 오래지 않아 양반 자제에게 경학을 지도할 만큼 안목을 지니게 됐다. 
‘명종실록’ 권13에 따르면 스님이 무주고혼을 위해 수륙정재를 열었을 때 인근에서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선의 부흥을 위해 무차대회를 열어 스님과 속인에게 추앙을 받자 그 명성이 서울 대궐에 이를 정도였다. 스님은 오래지 않아 금강산의 고승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1548년(명종 3) 9월, 금강산을 내려와 호남으로 가던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의 부름을 받았다. 봉은사 주지를 맡아달라는 요청이었다. 당시 봉은사는 유생들에게 ‘승려들의 뿌리’라고 인식될 만큼 당시 불교계의 중심사찰이었다. 스님은 봉은사 주지를 맡으며 헌신적으로 불교중흥에 온 힘을 쏟았다. 사찰에 난입해 소란을 피우거나 기물을 파손한 유생들의 출입이 금지됐다. 사찰 토지도 조금씩 되돌려 받았다. 특히 1550년(명종 5), 48년 전 사라졌던 선‧교 양종이 부활했다.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이 돼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었다. 
보우 스님을 스승처럼 받들었던 문정왕후는 스님의 조언에 따라 중종의 묘를 봉은사 옆으로 이장해오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기를 소원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은 전국 으뜸을 자랑할 만큼 커졌다. 갖가지 불교 행사가 연이어 열렸다. 스님은 판선종사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직함을 받았다. 조정이 정식 직함에 따라 보우 스님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다. 
사대부들이 즉각 반발했고 유생들은 집단 시위에 나섰다. 조정대신뿐 아니라 지방유생들까지도 상소에 동참했다. 보우 스님이 선종판사에 임용된 후 6개월 동안 올라온 양종 복구 반대 상소가 423건, 보우 스님을 죽여야 한다는 상소도 75건이나 됐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보우 스님은 보현사, 회암사 등 퇴락한 사찰을 중창했고 선종과 교종의 승과를 다시 설치해 유능하고 합법적인 승려 인재 양성에 힘썼다. 전국에서 널리 인재를 구하는 승과고시 도입으로 봉은사 앞 들판은 승과고시를 시행하는 승가평(僧家坪)이 됐다. 과거 시험 날, 봉은사 앞은 수천 명의 승려가 모여들어 ‘중의 벌’로 불리기도 했다. 승과에서 선발된 인물 중에는 훗날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을 맡아 전국 승병을 이끌었던 청허 휴정(1520~1604) 스님과 그의 제자 사명 유정(1544~1610) 스님도 포함돼 있다. 이후 조정에도 불교신자가 크게 늘었고 내원당에는 불공을 드리려는 사람들로 붐볐다. 각도의 관찰사와 군수가 불교를 옹호했고 삭발하고 출가한 사대부들도 적지 않았다.
성리학 외엔 이단으로 치부했던 유생들에게 보우 스님은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끊임없는 모함과 질시에 보우 스님은 선종판사 임무를 휴정 스님에게 맡기고 한발 물러섰지만 2년 후 다시 봉은사로 돌아왔다. 당시 수많은 이들이 봉은사로의 복귀를 말렸지만 스님은 “지금 내가 없으면 후세에 불법은 영원히 끊어질 것이오.”라며 만류를 뿌리쳤다.
유생들의 온갖 모함과 상소에도 고군분투하며 불교중흥에 헌신했던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며 위기를 맞았다. 스님은 1565년(명종 20) 4월6일 문정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달 25일 직책을 박탈당하고 도성 사찰 출입조차 금지당했다. 이후 유생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스님은 두 달 후 제주도 귀양길에 오른다. ‘명종실록’ 권 31에 따르면 당시 한양으로부터 밖으로 팔방에 이르기까지 유생들이 구름처럼 모여 상소를 올렸고 그 수가 무려 1000회를 헤아릴 정도다. ‘어우야담’ 권3에는 보우 스님이 제주도에서 제주목사 변협이 힘이 센 무리들에게 매일 스님을 때리도록 함으로써 장살로 순교한 모습이 묘사돼 있다. 세수 56세, 법랍 41세였다. 스님의 입적으로 선교양종과 도첩제는 다음해 폐지되고 말았다. 
목숨 바쳐 사그라져가던 법의 등불을 다시 밝혔던 보우 스님은 옳음을 위해 스스로 죽음의 길을 향해 기꺼이 걸어 들어갔다. 보우 스님과 문정왕후의 노력으로 부활했던 조선불교는 다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조선왕조 500년에 걸친 불교탄압의 역사에서 보우 스님으로 대표되는 불교중흥 기간은 아주 짧을 수 있다. 하지만 그때 뿌리내린 불교중흥의 씨앗은 나라의 존망 시기마다 백성을 지켜내는 데 불교가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강남 대표 사찰인 봉은사는 보우 스님의 정신을 계승하고자 2013년에는 경내에 스님의 동상을 세웠다. 이에 앞서 2000년에는 보우당을 건립, 스님의 불교 중흥의 큰 뜻을 기리고 있다.
보우대사는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를 중흥시킨 순교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을 주장하여 선과 교를 다른 것으로 보고 있던 당시의 불교관을 바로 잡았고, 일정설(一正說)을 정리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저서로는 <허응당집(虛應堂集)>,<나암잡저(懶庵雜著)> 등이 있다.
현재 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평화통일불사리탑사 내에는 보우대사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이 절 바로 아래 바닷가에 보우대사가 유배 올 때 제주도에 첫 발걸음이 닿은 조천포구와 연북정이 자리하고 있어 그때의 참담한 비극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 안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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