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6] - 서천암(逝川庵)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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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6] - 서천암(逝川庵) 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1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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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시를 매우 잘 지어 유학자들도 그의 시를 애송하였다고 하는 고려시대 고승 혜일의 시에는 서천암은 도인(道人) 종해(宗海)가 창건하였다는 구절[道人有宗海 卓庵向川邊]이 있다. 도인 종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고려의 정언(正言) 이영(李潁)이 완도에 유배되자, 그의 숙부인 중 혜일이 따라와서 찾아보고 곧 섬(제주)으로 들어가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하였다. 이를 근거로 유추해 보면 혜일 스님이 제주도에 들어와 산방굴사를 창건하고, 묘련사, 서천암, 보문사, 법화사 등 여러 절들을 돌며 시를 남긴 것은 이영의 완도 유배 시기인 고려 고종36년(1250) 후인 것이 확실하며, 혜일 선사가 제주에 머문 시기는 고려 충렬왕 무렵인 1275년에서 1308년 사이다. 
그가 서천암에 머물고 시를 지었다면 최소한 1200년대 초반 이전부터 이 사찰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옛 문헌들을 근거로 서천암은 12세기 경에 창건되었으며, 김상헌이 『남사록』을 기록할 당시인 선조34년(1601)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천암의 정확한 위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서천암에 대해서 김상헌은 『남사록』에 ‘都近川上今廢(도근천 위에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기록하였고,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는 ‘在朝貢川上(조공천 위에 있다)’이라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조공천이나 도근천 등의 하천 이름은 지금의 외도천을 말한다. 해안동 지역에서는 무수천으로 부르기 때문에 조공천이나 도근천을 기준으로 위치를 말한 것을 보면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천암 터로 추정하고 있는 곳은 제주시 해안동 2278-2번지인데 외도동 해안(조공포)에서 이곳까지는 약 4㎞이다. 동·남쪽으로 높이 10m 정도의 구릉이 어우러져 있다. 구릉 민묘의 비에 고불전(古佛田)이라고 표기된 것으로 보면 예로부터 이곳을 절왓이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의 바로 서쪽 하천에는 무수천 8경의 첫째인 보광천이 보인다. 

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현재는 과수원이 조성되어 있는데 많은 수량의 기와, 도자기 조각 등이 산포되어 있다. 전문가의 발굴 결과를 보면 12세기에서 17세기까지의 유물인 청자국화문흑백상감 조각, 분청사기백상감 조각 등의 도자기 조각과 도질토기, 그리고 당초문암기와 조각 등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주춧돌과 같은 석재가 발견되지 않아 절집의 규모는 알 수 없다.
밭주인은 이곳에 절집은 없었지만 ‘덕절’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밭 남쪽 경계에 작은 용천수가 있는데 지금은 가뭄 때에는 거의 말라 있지만 비가 온 후에는 제법 물이 흐른다. 이 옹달샘 바로 위에서 오래도록 石佛(미륵불)이 모셔져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러 다녔기 때문에 밭 주인은 경작에 어려움을 토로하며 미륵불을 양○○(돌나무식당 대표)씨에게 보관해 줄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1980년대의 일이다. 
서천암 터에 있던 미륵불은 현재 돌나무식당 경내로 옮겨져 향나무 밑에 자리해 있다. 미륵석상을 살펴보면 키는 1.3m 정도이며 얼굴은 표현하였지만 그 이하는 길쭉한 자연석 그대로이다. 조성 양식이 고려초기의 민중적인 미륵부처의 형태를 갖고 있어서 이 미륵석상은 1200년 이전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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