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7]
상태바
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7]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22 14: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민중의 염원을 담은 회천동 오석불(五石佛)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제주시 회천동은 새미와 는새라는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새미마을 북서쪽에는 새미숭물이라는 숲이 펼쳐져 있고 그 맨 아래 자락에 1968년에 세워진 화천사라는 절이 있고 그 뒷뜰에 오석불이 있다.
절 동쪽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새미물이라는 용천수가 있고 이 물을 생명수로 해서 마을이 생겼다. 새미마을은 옛지도에 천미(泉味)로 나타나는데 설촌한 지 400여년이 되었다. 이 샘물이 미인과 인재를 배출하는 근원이라고 마을 설촌 유래에서는 밝히고 있다. 
석불이 있는 곳은 절동산이라고 한다. 절동산에는 마을이 생기기 훨씬 전인 고려시대부터 절이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절에 이 오석불이 있었고 1702년 이형상 목사에 의해 절은 불태워졌고 석불만 남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형상 목사의 글에는 이 마을의 절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석불이 있는 바로 북동쪽 회천동 2410번지 일대가 속칭 절터왓 또는 절왓이라 불리며 고려시대 절터라고 알려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 조사 결과 분청사기와 백자, 그리고 도기와 어골문의 기와 등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속설로는 고려시대에 사찰이 폐사되자 마을 주민들이 부처님 대신 오석불을 만들어 모셨다고 한다. 이와 같이 절에 오석불이 있었다는 주장과 절이 없어진 후 만들었다는 주장이 양립하고 있으나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문헌이나 과학적 근거는 아직 나타난 바 없다.
오석불은 자연석에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사람 얼굴 모양을 새긴 조각품이다. 상반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석불의 크기는 70∼85cm 정도이며, 돌의 모서리에 얼굴의 중앙을 나타낸 것이 3기, 평평한 면에 얼굴을 나타낸 것이 2기이다. 제주도에서 이와 비슷한 석불의 사례는 해안동 서천암지 석불과 도평동 흥룡사 미륵불이 있다.
사람들은 이 오석불 앞에 아이를 무사하게 낳고 기르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빈다. 이곳에서 치성을 드리면 득남한다는 속설이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기자(祈子)불공을 드리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화천사를 세우게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제주도의 다른 마을에서는 포제 또는 이사제를 지내는데 새미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초정일(初丁日)에 석불제를 이곳에서 지낸다. 석불제의 신 이름은 석불열위지신(石佛列位之神)이다. 석불제를 지낼 때에는 석불에 송낙을 씌우고 종이옷을 입히며 실로 허리를 맨다. 마을 사람들에게 석불은 스님 혹은 심방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석불제는 형식으로 볼 때 유교식 마을제이며 내용상으로는 차리는 제물로 볼 때 떡·과일·채소 등을 쓰고 육류를 배제하는 것을 보면 민간신앙적 요소를 지닌 불교식 마을제임을 알 수 있다. 
석불제를 지내면 무병(無病)·포태(胞胎)·득남(得男)의 효험이 있다고 하며, 제주도 전역에 호열자가 창궐하였을 때에도 오석불이 지켜주어 마을 사람들 모두가 무사하였다고 전해진다. 여느 마을의 미륵신앙과도 같은 효험을 가진 것으로 기자(祈子)신앙과 마을공동체신앙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대부분 미륵불은 민간신앙으로 변하여 모셔지고 있지만 회천동 새미마을에서는 민간신앙으로서의 미륵신앙을 다시 사찰 안으로 들여와 불교화한 특이한 과정을 가지고 있다. 사찰이 민간신앙을 포용한 것이다.
어떤 자료에는 ‘좌우에 좌정한 산신상(山神像)과 용왕상(龍王像)은 그보다 조금 작다’는 표현이 있으나 산신상과 용왕상은 보이지 않는다.


     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