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⑤ - 빼앗긴‘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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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⑤ - 빼앗긴‘광장’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2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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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그 자유를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 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서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소설 『광장』을 처음 발표할 때 소설가 고 최인훈이 썼던 서문 가운데 일부다. 그때가 1960년 10월이니, 웬만한 독자라면 작가가 말한 “구정권”이 ‘자유당의 이승만 정권’이고 “빛나는 4월”은 ‘4·19혁명’이며 “새 공화국”이란 ‘민주당의 장면 내각’임을 짐작할 것이다. “자유를 ‘사는 것’”이란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폐쇄되고 억압됐던 ‘광장’에서 자유롭게 민주주의를 토론할 수 있는 상태, 이른바 ‘광장 문화’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작가의 바람은 채 1년도 되지 못하고 박정희에 의해 좌절되고, 박정희가 사라지자마자 전두환에 의해 또다시 좌절된다. 그 뒤 20여 년간 좌절됐던 ‘광장 문화’는 1987년 6월 항쟁과 같은 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회복되는가 싶더니, 그해 대선에서 패배한 뒤 다시 빼앗기고 만다.
우리가 광장을 되찾은 것은 정치가 아닌 스포츠를 통해서였다. 2002년 한·일 월드컵. 군중들은 민주주의가 아닌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다. 이미 1987년에 절차적 민주주의를 쟁취한 덕분이기도 했고, 내용적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기만 했으나 군중들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 획일적인 모습을 텔레비전으로 본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다(그로부터 4년 뒤 다음 월드컵에서 그 모습을 봤을 땐 ‘쪽팔렸다’). 월드컵이 한창이던 6월 13일 미군 장갑차에 깔려 미선이·효순이가 사망했고, 추모 촛불집회가 11~12월에 걸쳐 있었다. 
광장이 다시 ‘광장 문화’를 되찾은 때는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를 통해서였다. 3월 12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된 뒤 5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기각 결정이 내려질 때까지, 헌재 앞에서는 탄핵을 지지하는 집회가 열렸고 반대편에서는 탄핵을 반대하는 촛불집회가 열렸다. 같은 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는 국가보안법 반대 촛불집회가 있었다.
2008년 5~6월엔 미국 광우병소 수입 협상 반대 및 이명박 퇴진 촛불집회가 있었다. 2009년 1~2월엔 용산 참사 추모 촛불문화제가 있었다. 2011년 6월엔 반값등록금 공약 촉구 촛불집회가 있었다. 2013년 6월엔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규명 촛불집회가 있었다. 2016년 10월부터 2017년 4월까지는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규탄 및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가 있었다. 2019년 8월부터 그해 말까지는 조국 구속 집회와 조국 수호 및 검찰·언론개혁 촛불집회가 팽팽히 맞섰다.
1980년대 이후의 굵직한 집회만 열거해도 이 정도다. 광장은 민주주의의 마당이자 정치·사상 표현의 공간이었다. 그 광장이 2020년에 접어들면서 폐쇄되고 급기야 정권에 빼앗긴 것이다. 정부와 서울시는 코로나19를 이유로 광화문 일대 및 서울시청광장 등에서 일체의 집회를 금지하고 있다. 생계가 걸린 아이아나KO노조의 농성 텐트도 세 차례에 걸쳐 철거한 바 있다.
그러나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시민분향소는 버젓이 서울시청광장에 설치했고 불특정다수의 조문객들이 다녀갔다. 박원순은 성추행 가해자로 지목된 용의자일 뿐만 아니라 5일장(葬)에 반대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이 50만 명을 넘었던 상황에 비춰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행위다. 적지 않은 이들이 아직도 박원순을 추모한다. 그것까지야 개인의 자유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정권이 보이는 이중잣대 정도는 비판해야 올바른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과의 이해관계를 따져서 광장에 서는 것은 인지상정이겠지만, 자신과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더라도 다른 사람의 생계가 걸린 문제라면 함께 광장에 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상 다른 이의 생계를 돌보는 것이 곧 내 생계를 위하는 길일 터이므로.

“인간은 광장에 나서지 않고는 살지 못한다. (…) 어떤 경로로 광장에 이르렀건 그 경로는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그 길을 얼마나 열심히 보고 얼마나 열심히 사랑했느냐에 있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나온다.“ 
(『광장』,「1961년판 서문」에서)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누려야 하는 존재라고 말이다. 마찬가지로 코로나19로 정부가 지급한 긴급재난지원금 또한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국가가 의무를 다하고 있는 것뿐이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지급하는 기본 소득 또한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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