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8] - 유서깊은 함덕 강림사와 세계유일 현무암 기왓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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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8] - 유서깊은 함덕 강림사와 세계유일 현무암 기왓굴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7.29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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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덕림사(德林寺)는 함덕리 1279-2번지에 있으며, 현재 덕림사가 있는 곳에서부터 1290번지 일대에 고려시대의 사찰로 전해오는 강림사가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 제주목(濟州牧) 불우(佛宇)조에는 제주도의 사찰 15곳을 소개하면서 강림사는 제주 동쪽 함덕포구에 있다(江臨寺州東咸德浦口)고 하였다. 강림사 터 북쪽에는 강영개라고 부르는 포구가 있다. 김상헌의 남사록(南槎錄, 1601년)에는 ‘원나라 때 세운 절인데 절 앞에 화표(華表=무덤 앞 양쪽에 세우는, 여덟 모로 깎은 한 쌍의 돌기둥)가 있고…’라는 기록이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1653년)에도 강림사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랫동안 존속되었던 절임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어 그 원형을 찾을 수 없지만 이곳 주택에는 절집에 썼던 것으로 보이는 기단석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기와편과 자기편(도질토기,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조각)을 포함하면 40여 점이 발견되었다. 기단석들은 모두 다공질 현무암으로 세 면이 세밀다듬으로 되어 있으며, 나머지 한 면은 아주 거친다듬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기단석 외에도 한 면만 세밀다듬으로 되어 있는 석물들도 발견되었으며 고냉이성창 주변 경작지에도 많은 기와편과 도기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1290번지 주택 뒤편으로는 넓은 공터에 옛 계단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강림사를 둘러쌌던 담장으로 추정되는 곳도 있다. 
덕림사 대웅전에는 1956년 해운스님이 욋골절에 있던 소조아미타불좌상(높이 46.8㎝, 너비 17.5㎝, 조선후기 작품)을 모셨다고 한다. 현재 덕림사의 주불은 1980년에 봉안한 철조아미타불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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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서우봉 산책로 입구인 함덕리 191번지 일대는 속칭 와막팟(와막, 왯굴)이라 부르며 여기에 기와를 굽던 가마(瓦窯)가 있다. 제주에서는 가마를 굴이라 부르기 때문에 흔히 평사동 기왓굴이라고 부른다. 현무암과 진흙을 빚어서 축조했는데 현무암으로 지은 기와가마는 세계에서 유일한 것이다. 
길이 750cm, 너비 220cm, 높이 160cm 정도이고 앞이 낮고 뒤가 높다. 지금은 화구(火口) 부분은 유실되어 버렸다. 뒷면 굴뚝(배연구)은 묻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성실(燒成室)은 뒤로 갈수록 높아져 약 10°정도의 경사를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별다른 시설물이 없이 양쪽 벽에서 천정까지 반원을 이루고 있다.
가마의 좌우 양쪽에 작업장이 있던 것으로 보이는 평지가 있는데 많은 기와들이 흩어져 있다. 여기서 생산된 기와들은 관가·사찰·주택 등에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암키와·수키와 등의 평기와들이다. 암막새·숫막새 등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기와의 무늬를 기준으로 종류를 살펴보면 어골문(魚骨文)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무문(無文)·어골사각문(魚骨四角文)·어골원문(魚骨圓文)·어골격자문(魚骨格子文)·복합문(複合文) 등이 있다.
가마를 사용했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시대에 주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 함덕현(咸德縣) 터에 흩어져 있는 기와편들과 흡사한 것들이 많은 것을 보면 꼭 이 가마가 아니더라도 이 지역 가마의 사용 연대를 추정하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강림사 건축에 쓰인 기와도 여기서 만든 것은 아닐지? 
현재 기왓굴은 앞부분뿐만 아니라 중간 부분도 무너져 내렸고, 안에는 각종 쓰레기가 버려져 있어서 세계유일의 귀중한 문화유산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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