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9] '4.3의 아픔 간직한 고분다리마을 욋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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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9] '4.3의 아픔 간직한 고분다리마을 욋골절'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12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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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욋골은 함덕리과 대흘리 고분다리마을의 경계에 해당하는 곳의 지명이다. 괴못이라는 넓은 연못(지금은 저류지)이 있고 연못 남쪽 400m 지점 함덕리 1974-1번지에 욋골절이 있었다. 1934년 신홍연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가 1948년 방화로 폐사된 사찰이다.
송파당 신홍연 스님은 전남 순천 출생으로 일본에서 불교 공부를 하였다. 1934년 11월 함덕리 백양사 포교소인 욋골절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 7월 백양사 함덕포교소로 설치 신고를 했다. 당시 절터는 약 700평 정도였으며, 요사채와 정자 그리고 40~50평 정도의 초가 법당이 있었다고 한다. 1937년 음력 10월 29일부터 11월 1일까지 3일 동안은 최청산, 김신산, 이성봉 스님을 모시고 법화산림 대작불사를 성대하게 거행하기도 하는 등 제주불교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창건주지 신홍연 스님은 당시 어려웠던 함덕의 경제를 일으킨 것으로도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욋골절을 창건했을 당시 함덕리 지역은 모래에 뒤덮인 경작지여서 영농환경이 열악하였었다. 어려운 함덕리민들을 위하여 제주불교운동의 한 형태로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서서 비파, 시금치, 무, 호배추 등을 보급하였으며 퇴비 만드는 법까지 가르치는 등 마을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농촌계몽운동이 실질적인 소득으로 이어지자 함덕은 물론 인근 마을에까지 욋골절의 영향력이 커졌고 주민들과 스님의 관계도 돈독해졌으며, 여러 초등학교에서 욋골절로 소풍 또는 견학을 가기도 하였다. 
4·3 사건 당시였던 1948년 11월 초순 무렵 욋골절도 해안마을로 소개되었다. 이 때 불기(佛器), 경전 등은 원당사를 비롯한 다른 사찰과 함덕리 민가 등 여러 곳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욋골절이 소개된 후에도 스님은 조천리와 함덕리 등에 머물면서 군인들의 눈을 피해 욋골절에 왕래하였다. 이런 위험한 상황이 이어지는 동안 토벌이 격화됨에 따라 마을 청년들은 쫓기는 몸이 되자 욋골절로 찾아들었고 스님은 그들을 거두어 숙식을 제공하였다. 그러던 중 11월 중순경 법당 내

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부처님 뒤에 은신해 있던 무장대 수십명이 토벌대에 발각되었다. 
토벌대는 신홍연 스님을 절에서 2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끌고 가 귤나무(댕유지낭)에 묶어 놓고 민보단원들에게 총을 주며 사살하도록 했지만 스님과 함께 농사일을 배우며 새 꿈을 키워가던 사람들이라 차마 쏘지 못하고 허공에다 총질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토벌대는 격분하여 이번에는 민보단원에게 죽창을 주며 찌르라고 했고 민보단원들은 울부짖으며 죽창으로 스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토벌대가 떠난 후에도 8∼9시간 동안 스님은 숨을 쉬고 있었으며 가부좌를 한 채 염불하며 돌아가셨다고 한다. 무장대는 스님의 시신을 고구마 줄기로 감싸 숨겨 놓고 그 위치를 편지에 적어 가족에게 전해 주었다. 상좌 김두전 스님이 제발 몸을 펴십사고 기도하여 가부좌로 입적하신 스님의 몸을 펴서 매장하였다.
이어서 1948년 11월 20일 욋골절은 토벌대에 의해 불태워졌고 같은 날 인근 고분다리마을도 방화되었다. 욋골절에서 모시던 불상(아미타불좌상)은 1956년 해운 스님이 함덕리에 덕림사를 창건하면서 모시게 되었다.
현재 욋골절터에는 신홍연 스님의 가족에 의해 세워진 비석(創建住持松坡堂申公鴻然之碑)이 있으며, 비석 주위에는 당시 건물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직육면체 모양의 석재가 몇 개 남아 있을 뿐 절의 흔적은 없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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