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0] - 어둠과 무명을 떨친 일광보살의 본향-일출봉과 동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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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천 김대규 화백의 제주불교 화첩기행 [10] - 어둠과 무명을 떨친 일광보살의 본향-일출봉과 동암사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8.20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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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_ 고영철(제주문화유산답사회장)

 

로천 김대규화백
로천 김대규화백

성산읍 성산리에는 제주 최고의 관광지인 일출봉이 있다. 원래 이름은 성산(城山)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탐라지에 성산(城山)이라고 기재되어 있으며, 1960년대까지 대부분의 문헌에서 성산으로 표기해 왔다. 성산은 산 모양이 성과 같다는 데서 붙인 것이며, 여기에다 해가 뜨는 것을 볼 수 있는 봉우리[日出峯]라는 의미가 더해져 성산일출봉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북서쪽 꼭대기에 봉수대를 설치하기도 했었다.
성산일출봉은 도내 많은 오름들 중의 하나이지만 출생은 남다르다. 대부분의 오름은 육상에서 일어난 화산 분출의 결과이지만 일출봉은 수중에서 태어난 것이다. 수성 화산체인 하이드로볼케이노의 일종인 응회구[tuff cone]에 해당된다. 특히 수심이 얕은 해저에서 분출하여 해수면 위로 성장한 전형적인 섯치형[Surtseyan type] 화산체이다. 폭발이 일어나면서 분출된 미립질 화산재가 화구를 중심으로 퇴적된 언덕이었다. 그렇지만 일출봉은 화산폭발 당시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해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경사면이 파도에 깎여 나가면서 화구 내부만 남은 형태가 됐다. 그리고 바깥쪽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지금의 모양으로 변한 것이다. 침식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그러면 성산일출봉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학자들은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신양리층에서 단서를 찾았다. 일출봉에서 떨어져 나온 화산물질들이 신양리 방향으로 이동해 ‘신양리층’을 만들어 놓았는데 이 신양리층에 많이 포함돼 있는 조개화석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모두 5천년 내외의 것들로 밝혀졌다. 5천년 이전 조개들은 발견되지 않았다. 일출봉에서 떨어져 나오는 화산물질에 조개들이 파묻혀 화석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일출봉은 약 5천년 전 화산 분출로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분화구 안쪽은 넓이 2.64㎢의 초원으로 세수대야 같은 모양의 평지를 이루고 있다. 분화구 안은 옛부터 성산리민의 연료와 초가 지붕을 이는 띠와 억새 등의 채초지로 이용되었고 방목지로도 쓰여져서 매년 화입(火入)을 했기 때문에 나무는 거의 없고 억새와 띠의 군락을 이루고 있다. 최근에는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기 시작하여 제거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일출봉의 북서쪽 자락(성산리 116번지)에는 동암사가 자리잡았다. 전에 본지에 일출봉을 동암사의 거대한 탑이라고 표현한 기사가 있었는데 참으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향토사학자 고영철
향토사학자 고영철

동암사는 1934년 이 마을에 살던 김기옥씨가 절터를 마련하고 창건주인 기산옥(자선화)씨가 남편의 극락왕생을 기원하기 위해 신도들의 후원에 힘입어 불사가 이뤄졌으며, 1937년 5월 1일 ‘조선사찰 대본산 위봉사 성산포 포교당’으로 처음 등록되었다고 한다. 1943년에는 ‘조계종 대본산 백양사 성산포 포교당’으로 변경되었다. 절 이름은 일광사, 일출사, 동화사, 경봉사 등 여러 차례 바뀌다가 1964년 동암사로 정착하였다. 1972년 송재술 주지스님 때에 35평 규모의 대웅전을 준공하였고, 1989년 진철 주지스님이 대웅전 중창에 이어 범종각, 요사채, 심검당, 만월당, 종각을 세웠다. 
동암사는 동짓날에 팥죽공양, 정월대보름에는 오곡밥 공양,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 전달 등으로 주민들과 많은 소통을 하고 있다. <불교의식신행독송집>을 제작해서 나눠 주기도 했다. 마당에 듬직하게 자리잡은 ‘포대화상’이 매우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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