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타사지에서 관나암.영천사지를 지나 월라봉 심우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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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타사지에서 관나암.영천사지를 지나 월라봉 심우대까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2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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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창간 31주년 기획 - 제주불교문화유적지순례1

제주불교는 창간31주년을 맞아 불교문화유적을 순례하기로 하였다. 제주불교신문은 제주불교성지순례길 <절로 가는 길>을 지난 2012년 개장된 지계의 길을 시작으로 정진, 보시, 선정, 인욕, 지혜 이렇게 모두 6개의 길이 2018년까지 완성했다. 
순례길은 염불을 하거나 화두참선도 할 수 있고, 위빠사나 명상을 하면서 호흡에 집중하기도 좋은 길이다. 순례길이 곧 수행길이 되고, 그 길에는 절이 있어 들르는 곳마다 아름다운 풍광과 독특한 운치가 풍만하다.  
제주불교신문 창간 31주년을 맞아 기획된 제주불교문화유적지순례는 특히 인간들이 자연과 타자들에게 행했던 모습을 반성하면서 스스로의 자정(自淨)을 도모하고, 불교문화순례를 통한 새로운 신행문화를 모색해보기 위하여 시작되었다. 순례길을 걸으면서 일상에서 잃은 자신의 내면의 보석을 찾는 힐링의 시간과 공간으로, 코로나19를 극복하는 새로운 신행 모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모색하면서 말이다.   
첫 답사코스는 <선정의 길> 일부구간인 두타사터-쌍계암터-관나암-영천사터-심우대까지 잡았다. 1차로 지난 8월 28일, 본지 안종국 편집국장과 김대규 화백, 고영철 향토사학자가 다녀왔지만, 앞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동참하여 제주불교문화의 모습을 소개하는데 일조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세속의 번뇌 끊는 두타사

두타사 옛터
두타사 옛터

첫 답사지는 두타사터이다. 속세의 번뇌를 끊고 청정하게 불도를 닦는 수행처답게 울창한 산림의 깊숙한 곳에 두타사 터가 자리한다. 한라산 선돌 아래에 자리했다는 두타사는 탐라시대 발타라사(跋陀羅寺)까지 맥이 이어진다. 선덕사에서 울창한 숲을 따라 보도블럭이 자동차 바퀴간격에 맞게 이어진 선돌선원에 이르면 선돌 바로 남쪽 아래에 너른 차밭과 평지가 나타나는데, 그곳에 조그만 법당이 있다. 우리가 찾은 날에는 조성화 스님의 사위라는 분이 홀로 절을 지키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선돌선원에 의하면 이곳이 옛날에는 발타라사→쌍계사→정방사가 있던 자리라고 한다. 정방사는 100여년을 존속했던 절이라고 하는데 앞의 두 절은 창건연대가 불명하다. 현재 정방동에 있는 정방사의 연혁에 따르면 그 전신이 두타사라고 하는데 두타사가 1938년 이곳에서 창건되었다고도 한다.
법당 옆에는 20cm×20cm 정도의 주춧돌이 일정한 규격에 맞추어 열다섯 개가 땅에 박혀 남아 있다. 주춧돌로 봐서는 정면 5칸 측면 1칸 구조의 건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춧돌들은 두타사의 유물로 추정된다.
한편 선돌선원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다가 좌측 산 85-1번지에 세워진 쌍계암지 소개 입간판에는 그곳이 두타사 터라고 적고 있다. 임제 백호(1549~1587)의 <남명소승(南冥小乘)>의 기록에 따르면, 1578년 2월 15일 존자암 주지인 청순(淸淳)스님의 안내로 백록담을 등반한 후 지금의 선돌로 하산하면서 쌍계암에서 하룻밤 머물렀다고 되어 있다. 그 다음날에는 영천사지를 지나서 하산했다고 한다. 
임제는 제주목사였던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풍랑이 거친 바다를 조각배로 건너왔다고 하는데, 다시 돌아갈 때는 배가 가벼우면 파선된다고 배 가운데에 돌을 가득 싣고 갔다고 한다. 1577년(선조 9) 문과에 급제했으나 당쟁에 휘말리기를 꺼려해 세상과 인연을 끊고 벼슬을 멀리한 채 산야를 방랑하며 술과 음풍영월(吟風詠月)로 세월을 보냈다. 전국을 누비며 방랑했는데 남으로 탐라에서 북으로 의주 용만·부벽루에 이르렀다. 문집으로는〈백호집(白湖集)>이 있고, 700여 수가 넘는 한시 중 전국을 누비며 절과 승려에 관한 시를 포함해 방랑의 서정을 담은 서정시를 많이 남겼다.

영천관에서 영천사의 나례를 관람했다는 관나암
영천관에서 영천사의 나례를 관람했다는 관나암

영천관과 영천사, 관나암의 전설

상효동 1076번지. 서귀포산업과학고등학교 정문에서 맞은편 다리(상효교) 서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내려가면 하천 건너 동쪽으로 영천오름이 나타나는데, 바로 그 아래 내의 서쪽에 영천관 터가 있다. 영천은 며칠전 태풍이 뿌리고 간 비를 흠뻑 머금어 수량이 풍부했다. 
영천관은 서귀포 지역에서는 가장 먼저 세워진 관아로서 지방관들이 정의현과 대정현을 왕래할 때와 그리고 목장의 목마들을 점검할 때 사용하였던 숙소였다. 1466년 당시 절제사였던 이유의(李由義)가 제주목․대정현․정의현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역원(驛院)이 없는 까닭에 영천천(靈泉川, 또는 학림천鶴林川) 서쪽에 영천관 2동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매년 춘추에 점마할 때 병마절도사 및 현감 기타 중앙요로의 출장객들이 머무르도록 하였었고, 사철 풍류객들이 그치지 않아 기생들이 이들을 영접했다고 한다. 
영천사는 영천관 개울 건너편 동쪽에 있었다. 지금은 개울에서 가져다 쌓은 몽돌담만 남아 있고 폐사지터에는 잡초만 무성하다.  
이곳에 있던 영천사의 존재의의를 높여주는 것은 개울 건너편에 있는 관나암이다. 큰 바위에 해서체로 관나암(觀儺岩)이라 새겨져 있는데, 누가 어느 때 새겼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목사 이원조(李源祚)가 저술한 탐라지초본(1843년)에는, “영천천 냇가 큰 바위에 관나암(觀儺岩)이라는 석 자가 새겨져 있다. 옛날 영천사의 스님이 새긴 것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관나암이란 나례(儺禮)를 구경하는 바위라는 뜻으로, 영천관에서 영천사에서 행하던  나례(儺禮)를 구경하였던 장소였다.
나례는 역귀 즉 돌림병 귀신을 쫓아내는 의식(굿)으로 고려시대 때 중국에서 건너온 풍습이다. 관나암이란 바위가 남아있음을 볼 때 당시 제주의 사찰에서 행해지던 불교의식은 매우 성대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영천사는 고려시대 창건되었고 영천관과 더불어 이 지역을 방문하는 관리들의 숙소 역할도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폐사되었다고 전한다. 이로 볼때 관나암 석각은 영천관이 설립되었던 1466년에서 1601년 이전 사이에 새겨진, 제주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마애석각이리라....

월라사 옛터와 심우대

심우대
심우대

 

심우대(尋牛臺)는 1933년 8월 25일 법주사 신효포교소로 창건된 월라사 폐사지에 있다. 월라사 창건 당시 스님이 새겼는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수행하던 스님이 조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월라사 터 서쪽 큰 바위에 심우대(尋牛臺)라고 한문으로 음각되어있고 바위 위는 좌선(座禪)하기 좋게 넓으며 평평하다. 마을 노인들은 4.3시기 이전 어려서 스님이 심우대에서 좌선에 든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심우(尋牛)는 소를 찾는 것으로, 처음 발심한 수행자가 아직은 선이 무엇이고 본성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지만 그것을 찾겠다는 열의를 뜻한다. 
심우대에서 올려다 본 월라봉의 기개가 마음속에 강렬한 의지를 끄집어낸다. 아마도 심우대는 저 월라봉의 기개를 품어 불심을 증장하고 끝내 득도에 이르겠다는 용맹정진의 표상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지금 심우대는 문을 걸어 잠근 감귤밭에 자리하고 있어 접근하기가 불편하고, 안내표지판도 거리가 떨어진 월라봉파크골프장 입구에 세워져 있다. 
심우대 바위는 무성한 넝쿨에 가려져 그것을 걷어낸다고 고영철 회장이 땀을 뻘뻘흘렸다. 적지 않은 시간을 넝쿨을 걷어내니 무릇 심우라는 본성의 드러냄처럼 심우대라는 글자와 함께 바위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코로나19도 반면교사처럼 어쩌면 인간의 분별없는 욕망에 대한 과보의 프리즘을 드러내게 하는 심우대였을까? 사바세상은 바이러스가 가져온 끝이 안보이는 고통속에 일상이 무너졌지만, 심우대를 새겼던 어떤 선각자는 진리를 향한 길에 스스로를 돌아보라고 그렇게 말없는 가르침을 오늘도 보내고 있다.       

 안내 : 고영철, 정리 : 안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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