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거리 두고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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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거리 두고 바라보기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9 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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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
유현

코로나 2차 대유행으로 고통지수가 더 높아지고 있다. 관계의 단절로 인한 스트레스 곡선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또 육아와 가사, 취업과 결혼 등의 고민으로 적잖은 20∼30대 젊은이들은 우울증을 겪고 있다. 
 재택근무 또는 자가 격리 등 최소한의 자기방어조차 쉽지 않은 사회적 약자들이 처한 상황도 불편한 진실이다. 언제든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상황 변화에 따른 두 번째 고통이 엄습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음이라.
오늘날 일상적으로 쓰이는 불편함, 불안감, 불만족 같은 낱말들을 빠알리(Pāli) 어로 둑카(dukkha)라고 한다. 부처님은 “지금·여기 고통이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대가 고통을 겪고 있다거나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는 말을 결코 하지 않았다. ‘하늘엔 구름이 있다.’라고 말하듯 ‘고통의 현존’을 개인적 차원이 아닌 인식할 수 있는 하나의 단순한 사실로 표현했을 뿐이다.   
둑카, 곧 고통이 삶의 근본 조건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우리 불자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한 첫 번째 고귀한 진리인 고성제苦聖諦를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이러한 앎의 바탕 위에 고통을 자신과 연결하여 분별하거나 그것들을 없애려고 아등바등 애쓰지 않고 ‘그냥 바라보기’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신적 향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성싶다.
「초전법륜 경」(S56:11)에서는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고통으로 사고四苦 팔고八苦를 이야기한다. 코로나 역병에 걸리거나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리는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런 전염병에 관련된 아픔이나 불편함은 이에 그치지 않고, ‘자가 발전적 고통’이라는 심리적, 감정적 병통으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
소외감, 우울증, 불편함, 두려움, 분노 등의 부정적 정서가 ‘고통의 고통’을 낳아 고통은 진화하고 변화한다. 광화문 같은 열린 광장에서 집회를 갖는다거나 카페나 밀폐된 공간에서 다중 파티를 연다거나 성소에서 다중 예배를 함으로써 중생들은 즐거움과 편안함과 안도감을 추구하지만 티베트 불교에서는 이를 ‘면도칼에 묻은 꿀 핥아 먹기’에 비유한다.
문수보살이 물었다. “무엇을 고통(병)의 원인이라 합니까?” 유마거사가 답했다.     “대상을 쫓는 것이 원인입니다. 무엇이든 쫓는 것이 있는 한 고통의 원인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을 쫓는 것일까요? 세상 모두가 그 대상입니다.”
마치 칡넝쿨이 나무나 풀줄기가 없으면 감고 올라가지 못하듯이 마음이 일어날 때는 반드시 대경對境을 의지하고 일어난다. 불교에선 이를 ‘반연攀緣’이라 표현한다. 고통의 파도는 원인과 조건들의 상호의존이 만들어 낸 조건 지어진 법들이다.  
불만족, 불편함, 불평등을 고치겠다고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만들기’라는 기치로 대통령배杯 대회를 열었다. 그 결과 따름과 거스름 양쪽으로 각각 편을 먹고 무조건 좋아하거나 끝까지 싫어하는 팀워크를 짜고 3년째 리그를 치르고 있다. 그 와중에 간신히 연명하던 양심과 수치심은 거덜이 났다. 
위정자의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면 비열하고 옹졸해진다. 그 결과 국민들은 고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다. 과묵하면서도 강한 결단력의 소유자였던 세종대왕이 세제稅制 개혁을 위해 14년 동안 관료에서부터 시골 백성에 이르기까지 17만 명의 여론조사를 한 이유는 백성들의 고통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 고통의 반연이 쉰다고 할 수 있을까? 어디든지 앉을 수 있는 똥파리도 불꽃 위엔 앉지 못한다. 범부중생도 그러해 어디든 반연할 수 있으나 반야般若와 짝하지 못한다. 
미증유의 고통 속에 살고 있으면서 왜 불빛을 찾지 않는가? ‘둑카’로부터의 해방은 가능하다. 붓다는 그 길을 안내하고 있다. 우리 범부중생들은 그 내비게이션을 자기 속에 장착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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