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을 넘어 수행자들의 자취 묻어나는 유서 깊은 폐사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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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을 넘어 수행자들의 자취 묻어나는 유서 깊은 폐사지들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9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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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 창간 31주년 기획 - 제주불교문화유적지순례[2]
보목동 제지기오름 중턱의 수행굴
보목동 제지기오름 중턱의 수행굴

잡목과 넝쿨이 가로막고 풀이 무성한 제주불교문화유적을 찾아가는 길은 고행길이다. 태풍이 몰고 온 비와 한여름의 무성한 생명력이 온갖 잡풀을 드세게 제주의 산야를 짙푸르게 뒤덮은 성하(盛夏)의 잔재들은 무더위와 습한 기운 속에 땀이 축축한 발길을 지치게 한다.
그러나 아득한 그 옛날 구도의 일념으로 수행의 불국토를 찾아 들었던 스님들의 행적을 그리워하는 열정만큼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두 번째 순례길은 길의 흔적조차 희미하고 모두 정비되지 않은 잡풀의 향연이다. 지난 9월 4일, 제9호 태풍 마이삭이 제주에 강한 흔적을 남긴 직후라 부러진 나뭇가지와 무성하게 헝클어진 잡목이 우거진 여정이었다.        

서귀포 보목동 수행굴

자리돔축제로 유명한 보목동 포구에는 제지기오름이 불쑥 솟아있다. 보목동 바닷가에서 별장 옆으로 난 산책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암석 옆으로 조그만 길이 나 있다. 오름 위로 따라 가다보면 자연굴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보목동사 터로 추정되는 곳이다. 
보목동은 예로부터 불교와 관련된 지명과 설화가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지명은 보리수에서 파생된 ‘보목동’이며, 보목동의 동서를 가로지르는 옛길은 지금도 ‘보살길’이라 불린다. 보목동에 있는 ‘정술내’라는 큰 내는 스님들이 목욕을 하던 곳이라 해서 ‘중통’이라 불렸던 곳이다.
보목동 ‘제지기오름’은 ‘절오름’이라고도 부르는데, 마을 주민들은 제지기오름을 사악(寺岳=절오름)이라고도 부른다. 이밖에도 저즉악(貯卽岳), 저좌기(貯左只), 저적악(儲積岳), 저좌지악(貯左只嶽), 사악(寺嶽), 제제기오름, 절오름, 저즈기오름, 제좌기오름, 저저기오름 등 음이 유사한 이름이 많다. 조면암질 화산암과 일부 화산쇄설성 퇴적층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인 모양은 용암원정구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남사면은 매우 가팔라서 곳곳이 벼랑이다. 숲이 덮인 외관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안에 들면 곳곳에 바위가 서 있고 커다란 바위가 드러나 있다.
보목동 절터에 관해서는『서귀포시 지명 유래집』에 ‘굴사’라는 호칭도 남아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보목동 ‘제지기오름’의 남쪽에 있는 등반로를 따라 올라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구전에 의하면 이 동굴은 1930-1940년 경에 한 승려가 수도를 행하였던 곳으로 40여 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 상단의 굴은 올라가는 길이 없어져서 올라갈 수 없고, 하단의 수행굴로 가는 길도 잡풀과 가시덤불이 우거져서 길이 거의 사라져 버려 접근이 쉽지 않다.
남사면 중턱의 바위굴(수행굴)은 꽤 커서 입구 쪽이 6~7미터, 깊이 5~6미터의 넓이에 천장 높이 최고 6미터 가량이며, 아치형으로 되어 있으며 남향이다. 밑으로는 가파르게 비탈져 풀과 나무가 우거지고 양옆으로도 벼랑바위가 우뚝우뚝하다. 굴 내부에는 덩굴식물이 벽과 바닥을 꽉 채우고 있다. 바닥면은 평평하고 흙으로 다져졌으며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간이 넓어진다. 형태는 밖에서 보면 사각형이나 안쪽에서 보면 반타원형에 해당한다.
숲이 우거져 바닷가에서 올려다보면 빤히 보이는데도 길을 못 찾아 오름 정상까지 올랐다가 되짚어 내려와서 겨우 찾았다. 나무로 된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서 입구와 길을 정비하면 찾는이들이 쉽고 편하게 오를 수 있을 것같다. 
김대규 선생은 판소리를 완창한 예인답게 굴 안에서 우렁찬 ‘소리’를 뿜어냈다. 굴은 소리가 울리지 않고 한 방향으로 모아주는 듯해, 이곳에서 소리경연이나 작은 콘서트를 열었으면 좋을듯 했다.     

성불암터와 성불샘
성불암터와 성불샘

 

염불하는 지형, 성불오름 성불암지

수증기를 품은 습한 날씨로 제지기오름 아래 카페에서 빙수를 시켜서 더위를 식혔다. 바닷가를 따라 자연을 품고 카페가 여기저기 들어선 제주풍경을 다양한 관광객들이 메웠다. 코로나19로 해외여행이 어려워지자 제주에는 멋쟁이 노인 팀부터 젊은 커플들, 중년의 낭만객들이 붐볐다.  
고영철 회장은 보목동의 지명유래를 설명하고선 서둘러 송당리로 향했다. 
두 번째 답사지는 구좌읍 송당리 산266번지 성불오름 중턱에 위치한 고려후기~조선후기에 있었다는 성불암지를 찾았다. 

송당리 대천동에서 성읍 쪽으로 조금 가면 중이 염불하는 모습으로 보인다는 성불오름(해발 361.7미터)이 나타난다. 오름 입구에는 목장이 있어 말이 놀랄까 조심스럽다. 성불암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정의현(旌義縣) 「불우조(佛宇條)」에 등장하는데, ‘성불암재성불악(成佛庵在成佛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원진의 ‘탐라지’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인다. 
이 성불암지는 광령리 대각사 법무가 처음 발견하였다. 지금은 열반에 들었지만 법무는 이곳에서 기와편과 도자기편, 초석(礎石) 등을 발견하였다. 암·수 기와는 어골문이 대부분이다.
지금은 절터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다만 암자에서 이용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샘물인 성불샘이(成佛泉)는 지금도 시원스럽게 솟아나고 있다. 옛날에는 이 근처에 샘물이 없었기 때문에, 성불암 스님들은 물론 인근 지역 사람들까지 와서 물을 떠가곤 했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탐라지’「산천조(山川條)」에도 정의현 부근에서는 오로지 성불오름에서만 물이 난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성불오름 중턱 성불샘 위쪽에는 서북 방향으로 여러 기의 무덤이 있는데, 이 일대가 성불암지일 가능성이 높은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유물이나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성불암은 12세기경에 창건된 후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성불오름 중턱의 성불샘은 잘 보존이 되어 있으나, 성불암지는 우거진 잡목과 무덤들이 들어서 접근이 쉽지 않은데, 4.3 때에는 무장대가 주둔지로 사용했다고 한다. 

아늑한 풍수를 자랑하는 
고려시대 폐사지 보문사지

고려시대 사찰인 보문사지(것구리오름)
고려시대 사찰인 보문사지(것구리오름)

 

제주도에서 밝혀진 폐사지는 73곳에 이른다고 한다. 조천읍 대흘리 1230번지 것구리오름 일대도 고려시대 폐사지인 보문사(普門寺) 터로 알려져 있다. 자료들을 종합해 볼 때 12세기에 창건되어 17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되며, 절이 있던 곳은 해발 250m 정도 되는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제주목에 있던 사찰이 총 15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보문사지가 거구리오름 북쪽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보문사지로 알려진 것구리오름(꾀꼬리오름) 북쪽 기슭에 있는 경작지(약 3,000㎡)에는 청자흑백상감편, 청자참외모양병편, 분청사기인화문사발편, 백자 등의 도자기류를 비롯하여, 질그릇, 어골문기와편, 어골사각화문기와편, 어골정방십(×)자문기와편, 어골사각일(一)자문기와편, 어골정방선문기와편, 당초문기와편 등이 고루 확인되었다. 최근까지 기단석과 정초석들도 한 군데 쌓여 있었지만 현재는 모두 반출되었고, 절터의 북동쪽에 보문사지 원물이 보존되어 있다.
절의 동쪽 편에 물이 샘솟는데, 고영철 회장이 어렸을때 소를 올려보내 키울때도 이용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 혜일 선사가 보문사에서 참배하고 쓴 시에도, “절은 초라하니 거친 지경에 의지하였으나 샘물은 달디다니 꿈속에서 얻었네”고 기록을 남기고 있다. 
고려~조선중기까지 보문사는 제주목과 정의현을 오가는 길에 설치된 동원(東院)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사찰이었으나 이원진의 폐사정책 때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도에는 고려시대 말부터 불교가 융성한 불국토였다. 이번에 답사한 제주도의 오름들은 모두 불교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전설을 남기고 있어, 불자들의 순례에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기왕이면, 이 옛터에 기념물이나 불교유적의 일부라도 복원하면 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안내 : 고영철, 정리 : 안종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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