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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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2)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09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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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7)
(사진 1) 서안에서 둔황,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로마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지도.
(사진 1) 서안에서 둔황, 타클라마칸 사막을 거쳐 로마까지 이어지는 실크로드 지도.

 

실크로드는 말 그대로 중국의 비단을 서아시아나 유럽으로 실어 나르던 길이다. 물론 낙타를 이끌고 그 길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오는 대상들은 낙타 등에 서역의 신기한 물건들을 잔뜩 싣고 왔다. 기원 전후부터 10세기경까지 그들이 주로 다녔던 중국령의 루트는 위그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죽음의 사막 타클라마칸을 가운데 두고 사막 위, 아래로 돌아가는 길(사진1)이다. 그 길에는 천산산맥과 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들어와 만들어진 오아시스가 있는데, 그 오아시스들을 연결하며 이어진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서쪽 끝에는 천산산맥과 세계의 지붕이라는 파미르고원, 힌두쿠시산맥과 카라코람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중국과 서역을 갈라놓았다. 하지만 대상들은 이 도저히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험지를 뚫고 중국과 서역을 오갔다. 그런데 바닷길이 동서를 연결하면서 수많은 대상들이 오가던 실크로드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서서히 잊혀졌다. 그에 따라 실크로드를 따라 번성했던 옛 도시들도 사막의 모래 바람에 묻히기 시작했고, 19세기 후반 탐험대들에 의해 하나 둘 발굴되기까지 문헌을 통해서만 짐작할 수 있었다. 

(사진 2)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스타인 탐험대.
(사진 2)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스타인 탐험대.

 

 산업혁명을 통해 형성된 엄청난 경제력과 막강한 군사력은 유럽의 제국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아프리카, 아시아 및 아메리카 대륙 구석구석까지 침략해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만드는 동력이 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아시아에서 그들의 힘이 미치지 않은 곳은 아시아의 내륙 지역으로 교통이 불편한 중앙아시아 일부 국가와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 지역뿐이었다. 인도를 지배하고 있던 영국과 남하정책을 펴던 러시아, 대륙으로 힘을 뻗치려는 일본, 인도차이나 지역을 차지한 프랑스 및 독일, 스웨덴, 미국의 탐험대들이 경쟁적으로 이 오지에 찾아온 것이다. 이들 탐험대에 대해 탐험대를 보낸 국가에서는 이들이 아니었으면 무지와 종교 갈등, 도굴꾼들에 의해 파괴되었을 실크로드의 많은 유물들을 세상에 알려졌고 보존할 수 있었다고 자찬한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무참하게 파괴한 약탈자들이라고 비판한다. 더 타임즈의 기자였던 피터 홈커크는 이러한 이야기를『실크로드의 악마들』에서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사진 3) 1900년대 초 둔황 석굴을 관리하던 도교의 도사 왕원록.
(사진 3) 1900년대 초 둔황 석굴을 관리하던 도교의 도사 왕원록.

 19세기 후반 실크로드를 탐험하면서 많은 유물들을 중국 밖으로 가져간 탐험가로는 스웨덴의 스벤 헤딘, 영국의 오렐 스타인, 독일의 폰 르콕,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위너와 일본의 오타니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중 오타니 탐험대는 우리나라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가 수집한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유물들 중 삼분의 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그의 수집품들은 일본과 한국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순국한 뤄순에 나눠 보관하였는데, 일본이 패망하면서 그 일부를 우리가 소유하게 된 것이다. 이 탐험가들 중 둔황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인물로 오렐 스타인(Aurel Stein, 1862-1943)과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를 들 수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스타인은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고대 유적을 측량하고 발굴한 고고학자이다. 1906년에서 1908년에 영국박물관과 인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타인의 제 2차 탐사에서는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에 있는 호탄과 사막의 모래에 덮인 미란과 누란의 고대 유적을 발굴한다(사진2). 그러던 중 1900년 6월 둔황 석굴을 관리하고 있던 왕원록(王圓籙, 사진3)이라는 도교 도사가 한 석굴(16굴)을 정비하다 벽 안에 숨겨진 비밀의 방, 장경동(17굴, 사진4)을 발견했는데, 그 안에 수만 점의 고문서와 유물이 가득 차 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된다.

(사진 4)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장경동이라 불리는 둔황 17굴, 16굴 입구 한쪽 벽에 붙은 석실이다.
(사진 4) 엄청난 유물이 발견된 장경동이라 불리는 둔황 17굴, 16굴 입구 한쪽 벽에 붙은 석실이다.

급하게 사막을 건너 둔황으로 간 스타인은 석굴을 보수하는데 경비가 필요한 왕도사를 설득하여 그 유물들을 조사하고 아름다운 그림과 여러 종류의 언어로 쓰인 필사본 및 목판본 수천 점을 구입해서 영국으로 가져갔고, 그 유물들은 탐사를 지원한 영국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아마도 장경동은 1000년 전후한 시기에 송나라와 서하가 충돌하는 위급한 상황에서 누군가 불경을 비롯한 많은 문서들을 석실 안에 채우고 입구를 벽돌을 막아버려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힌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니까 스타인이 가져간 유물들은 누구의 손때가 묻지 않은 1000년 이전의 역사, 문화, 종교, 예술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였던 것이다. 이 성공적인 탐사로 스타인은 탐험가이자 학자로서의 명예를 얻었고, 1913년에는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는다. 이후 3차 탐사(1913-1916, 둔황과 타림분지 지역), 4차 탐사(1930년, 중앙아시아)를 하고, 1943년 80세의 고령으로 아프가니스탄 답사를 하다 카불에서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나고 그 곳에 묻혔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탐사 때 매번 대쉬(Dash)라는 이름의 개를 한 마리씩 데리고 다녔는데 그의 탐사에 평생 7마리의 대쉬가 동행했다(사진5). 
 스타인의 1. 2차 탐사를 통해 알려진 고대 실크로드의 옛 문명과 둔황에 대한 정보는 유럽과 미국, 일본의 많은 동양학자들을 그 지역으로 이끌어서 잊힌 문명과 유물들을 대대적으로 발굴하고 동시에 무참히 파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둔황은 스타인의 방문 이후 프랑스의 펠리오와 일본의 오타니 탐험대가 들려 왕도사로부터 유물을 구입하고 자기들 나라로 반출하였다.

(사진 5) 호탄지역을 탐사할 때 사진으로 중앙이 스타인과 두 번째 대쉬이다.
(사진 5) 호탄지역을 탐사할 때 사진으로 중앙이 스타인과 두 번째 대쉬이다.

 

프랑스 탐험가 펠리오는 프랑스 극동학원 교수로 여러 언어를 두루 잘했는데 한문과 중국어도 아주 능통했다. 그는 능숙한 중국어로 왕도사를 설득하고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3주 동안 장경동의 1만 5천~2만 부나 되는 필사본을 일일이 보고 중요도에 따라 분류하였다. 스타인이 유물을 가져감으로써 남은 좁은 공간에 쪼그려 앉아 촛불에 비춰보며 일일이 분류하는 작업(사진6)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1000년 더 된 글과 그림을 한없이 볼 수 있다는 사실은 심장이 터질만한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가 챙겨간 유물 중에는 혜초의『왕오천축국전』이 포함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펠리오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다른 약탈자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영원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여러 번 유물이 유출되고 나서 한참 지나서야 중국 정부는 왕도사를 처벌하고 남은 장경동 유물들을 베이징도서관으로 옮긴다. 하지만 베이징으로 가는 도중에 그나마 남은 유물들 중 많은 양이 감쪽같이 사라져버린다. 과연 스타인과 펠리오의 행위가 약탈일까 보존일까? 이는 여전히 논쟁거리다. 

(사진 6) 프랑스 중국학자 폴 펠리오가 둔황 장경동에서 유물들을 분류하는 모습
(사진 6) 프랑스 중국학자 폴 펠리오가 둔황 장경동에서 유물들을 분류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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