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밖의 세상 ⑧ - 컵에 반쯤 들어 있는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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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밖의 세상 ⑧ - 컵에 반쯤 들어 있는 물
  • 박인수 (자유기고가)
  • 승인 2020.09.16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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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_ 자유기고가
박인수 _ 자유기고가

“여러분들은 이 컵에 물이 얼마나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까?”

고등학교 때 국어 시간. 선생은 칠판에 거꾸로 선 ‘ㄷ’자 모양의 컵을 그리더니 그 안을 반으로 가르고 나서 위와 같이 질문했다. 반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웅성거렸고, 나는 속으로 ‘반 정도 있네’ 생각했다. 곧이어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으로 기억한다. 

“‘컵에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둘 다 맞는 말이지만, ‘반밖에 없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고, ‘반이나 있네’라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선생은 이번에는 사과 얘기를 했다. 크기가 각각 다른 사과가 다섯 개 있는데 어느 것부터 먹을지에 대해서. 나는 사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터라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선생은 ‘큰 것부터 먹는 게 좋다’고 말했다. 큰 것부터 먹으면, 오늘 다섯 개 가운데 제일 큰 것을 먹을 수 있고, 내일 네 개 가운데 제일 큰 것을 먹을 수 있고, 모레 세 개 가운데 제일 큰 것을 먹을 수 있고……. 즉, 매일 제일 큰 것을 먹을 수 있다는 논리였다.
대학 시절 후배와 데이트를 하던 중 뜬금없는 질문을 받았다. “상태가 각각 다른 사과가 다섯 개 있는데, 오빤 어느 것부터 먹겠어요?” 나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의 가르침대로 ‘제일 크고 좋은 것부터 먹겠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 후배는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일 많이 썩은 것부터 먹어야 해요. 안 그러면 다 썩어서 모두 못 먹게 돼요.”
과연 그럴까? 국어 선생과 후배가 놓친 것이 있다. 만약 사과를 먹고 싶어도 먹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면? 더구나 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상황에서라면 큰 것부터 먹느냐 썩은 것부터 먹느냐 따위는 사치에 불과하지 않을까. ‘컵에 물이 반이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컵에 물이 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분명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그러나 ‘반이나 있는 컵의 물’을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 없는 이가 절대다수라면 컵에 물이 반밖에 없든 반이나 있든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컵에 물이 반이나 있네’라고 긍정적인 생각으로만 그칠 게 아니라 가득 채우려고 노력하거나 더 많은 사람이 더 많이 먹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망이나 근거가 없는 긍정은 희망이 아니라 망상에 불과하므로.
우리는 이른바 ‘긍정 마인드’를 무슨 만병통치약인 듯 여기고 있다. 윌리엄 제임스가 했다는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성품이 바뀌고, 성품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말을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것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매사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분명 좋은 효과를 가져올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 말은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위험이 있다.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을 해결하지는 않고 개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것이다.
해방 직후 미 군정청 운수부는 ‘적자 타계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운수부 노동자 25%를 감원하고 월급제를 일급제로 전환한다고 결정했다. 그러자 철도노동조합은 여섯 개 항의 요구 조건을 제시하며 총파업을 단행했다. 미 군정청은 꿈쩍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군정청 운수부 부장 코넬슨은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며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윤대원,『일하는 사람을 위한 한국 현대사』 참조) 
긍정 마인드로 접근하면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는 조선 사람은 분명 행복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본질은 강냉이라도 먹을 수 있는 조선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굶고 있는 인도 사람에 있다. 즉 약소국가를 식민 지배하고 있던 제국주의가 문제의 본질이고, 식민지의 지배계급은 배불리 먹고 사는데 다수 인민들은 굶주리는 현실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배제한 채 “인도 사람은 굶고 있는데 조선 사람은 강냉이를 먹으니 행복하다” 운운하는 따위는 긍정 마인드가 품고 있는 함정이자 지배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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