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에세이 - 눈먼 범부·선한 범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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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에세이 - 눈먼 범부·선한 범부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23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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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현
유 현

가을이 왔다. 창문 밖의 황금 회화나무는 이파리를 벗기 시작하고 대추는 온몸이 빨개지려고 안달이 났다.  
지난여름 내 마음속에 무성했던 짙푸른 상념의 잎사귀들도 가을빛에 삭힌 단풍을 닮아간다. 빈방에 홀로 앉아 차 한 잔을 마시는데 난데없이 옛일들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불교문화의 분위기에서 어린 시절 가정교육을 받고, 학교교육을 통해 자아의식을 확립하고 그 힘들고 어려운 사법시험의 관문을 간신히 통과하여 변호사로서의 생업을 꾸려온 지 어언 33여 년이 흘렀다. 
우리 주변에서 떳떳한 직업에 종사하며 정신적 향상을 위해 신앙생활을 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 불자인 나 자신도 그 부류에 속한다. 불교가 해탈·열반을 지향하고 법(dhamma)을 중심으로 하는데, 그 불법 공부는 등한 시하고 오히려 법(law)지식을 파는 상인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는지 하는 자괴감에 시달려 왔다. 
자연과학적 지식이든 정치·경제학 지식이든 법률적 지식이든 모든 종류의 지식은 그 나름대로의 유용성과 가치가 있지만, 이러한 세속적 지식이 시공을 뛰어넘어 사물을 그대로 통찰하는 ‘지금 여기’의 앎[知]과 봄[見]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만들어내는 존재와 시간에 대한 지식에 불과하다는 각성이 생겨나자 소름이 돋아났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의 종교라 하는데, 그 지혜(반야)라는 것이 무엇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아니하던 차에「청정도론」과「아비담마(ABHIDHAMMA)」라는 책을 읽으면서 길을 찾기 시작했다.
법法이란 명칭은 같으나 세간의 법, 사회법은 출세간의 법인 불법佛法과 대조하면 그 대상과 공부방법이 매우 다르다. 학습과 경험을 통해 획득된 법 지식은 행위의 지침 혹은 평가기준으로 기능하거나 억제와 자유, 분쟁해결과 자원분배이라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할 뿐, 윤회의 세상으로부터 해탈하는데 방해가 되는 10가지 족쇄, 즉 올가미에서 벗어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숙고해보면, 우리들 삶이란 올가미에 속박된 삶이 아닐까 싶다. 욕망과 분노의 올가미, 그릇된 견해와 투쟁의 올가미 등으로 가득 찬 사회이다. 이 뿐만 아니다. 내 안을 들여다보면 잠재적 번뇌가 들끓고 있다. 애증으로 얽혀 있는 가족관계나 대인관계 역시 올가미이다. 언론과 방송 매체 등에서 속사포처럼 쏟아내는 온갖 정보와 환상의 이미지가 나를 삼키고 있다.
온갖 종류의 올가미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을 불교에서 범부凡夫라 하고, 이를 다시 눈먼 범부와 선한 범부로 나눈다. 이 둘 가운데, 나[我]라는 개념적인 존재(paňňatti)를 5온蘊·12처處·18계界 등의 법(dhamma)들로 해체해서 보려하지 않는 범부를 눈먼 범부라 하고, 이런 법들로 해체해서 보려는 노력을 하는 자를 선한 범부라 한다.
‘쪼개고 분리하는 앎’이 참다운 지식, 지혜이다. 세속적 지식과 지혜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상통하는 것이므로 지식을 멈추고 지혜를 계발할 수 있다. 둘의 차이점이 있다면 지식은 될 수 있으면 철저히 이해하여 줄어야 하고, 지혜는 가능한 한 많이 닦아 늘려야 한다는 점이다.
지식이 늘면 늘수록 나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고 아집이 강해지면 이기심과 자기중심적 생각에 빠지게 된다. 이 자아의식이 10가지 족쇄의 첫 번째인 ‘유신견有身見’이다. 이 족쇄에다 의심과 계금취戒禁取라는 두 가지 견취見取가 깨져야 범부에서 벗어나 유학有學의 첫 번째인 예류도에 도달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실현한 예류자·일래자·불환자·아라한을 네 부류의 성자(ariya)라 한다. 해체해서 보지 못하면 불교적 수행자가 아니다. 
이 가을엔 법을 대면해서[對, abhi] 진정한 전문가가 되어야 하겠다. 마치 같은 병속에 넣어도 물과 기름이 섞이지 않고 다르듯이 선한 범부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청명한 가을 하늘로 훨훨 날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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