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3)
상태바
감숙성(甘肅省) 둔황(燉煌) 막고굴(莫高窟) (3)
  • 제주불교신문
  • 승인 2020.09.23 1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영종 선생과 함께 가는 중국불교유적 순례 (18)
(사진 1) 둔황 유물을 수집해 영국으로 가져간 오렐 스타인 (1862-1943)
(사진 1) 둔황 유물을 수집해 영국으로 가져간 오렐 스타인 (1862-1943)

1900년 둔황 천불동을 관리하던 왕원록이라는 도교 도사가 석굴을 정비하다 우연히 제 16굴 복도 벽 안에 비밀스런 공간을 발견하였다. 방이 만들어지고 천 년이 지날 동안 그 벽 뒤에 비밀의 방이 있으리라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색이 바랬지만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벽 안에 갇혔던 수만 점의 불경, 고문서, 불화 등의 유물이 세상에 나오고 싶어 왕도사의 눈에 비쳤을지도 모른다. 전하는 얘기로는 우연히 연기가 스며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왕도사가 확인하는 과정에 장경동이라 불리는 제 17굴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왕도사는 자신의 발견 사실을 난주에 있는 관청에 보고했지만 당시 정국이 어수선한 때여서 관리들은 그 발견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왕도사에게 책임지고 관리하게 했다. 그러던 중 1907년 둔황 인근에 도착한 헝가리 태생의 영국 탐험대장인 오렐 스타인(Aurel Srein, 1862-1943, 사진 1)이 둔황 천불동에서 엄청난 양의 고문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천불동으로 가서 왕도사를 만난다. 하지만 관청으로부터 관리를 위임받은 왕도사는 장경동 발견 사실이 외부에 알려져 유물이 도둑을 맞거나 외부로 유출되면 자신이 책임져야 했기에 외부인들을 경계하였다. 스타인은 왕도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왕도사가 계획하고 있던 석굴 복원 사업에 관심을 보였고, 중국 승려이면서 인도를 다녀온 현장이 자신의 수호 성자라며 왕도사로부터 신임을 얻었다. 그리고 장경동에 있는 고문서와 경전, 그림들을 하나씩 꺼내 조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석굴 복원 사업에 상당한 기부를 하는 조건으로 일부를 영국으로 가져가는 것을 허락받게 된다. 16개월 뒤 필사본 24상자, 회화와 자수품 등 미술품 5상자가 영국 박물관에 도착하게 된다. 

(사진 2) 스타인이 가져간 장경동 불화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수하설법도' 당나라, 8세기
(사진 2) 스타인이 가져간 장경동 불화 중 가장 이른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는 '수하설법도' 당나라, 8세기

스타인이 둔황에서 수집한 문서는 완전한 것만 7천여 권, 일부만 남은 것이 6천여 권이었고, 회화(불교 탱화와 그림이 그려진 깃발) 작품도 수백 점이었다. 특히 이들 그림들 중 일부는 수세기 동안 위에 올려놓은 문서의 무게에 눌려 접힌 부분이 서로 붙어 있었다. 조금 무리해서 펼치려면 부스러질 위험이 있어서 복원작업을 하는데 7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1000년 넘는 기간을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온전히 발견된 이 놀라운 유물들은 조사, 분석을 거쳐 영국 박물관에 스타인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었다. 이후 스타인은 탐험가와 고고학자로서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영국 왕으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는다. 그가 영국으로 가져간 이 둔황의 유물들은 분명 중국과 실크로드의 역사, 문화, 종교, 예술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자료이다. 하지만 오늘날 영국 박물관에서는 그것을 있게 한 그의 열정과 노력, 공헌을 부각시키지 않고 숨기려고 한다. 바로 이 놀라운 유물들을 획득한 경로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스타인을 자국 문화재 도굴꾼으로 비난하며 지금도 그 유물들이 중국에 반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박물관에 소장된 외국 유물 대부분은 제국주의 시절에 불법적으로 획득한 것들이 많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간 외규장각 유물이나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불법으로 약탈해간 유물들에 대해서 우리가 반환을 요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 3) 살집이 많아 통통한 당나라풍 인물로 묘사된 수하설법도의 석가모니 왼쪽에 자리한 보살과 제자상
(사진 3) 살집이 많아 통통한 당나라풍 인물로 묘사된 수하설법도의 석가모니 왼쪽에 자리한 보살과 제자상

스타인이 둔황 유물을 가져간 뒤 90년쯤 지난 1994년 영국 도서관에서 일하는 수잔 위트필드(Susan Whitfield)는 스타인이 수집한 유물들을 중심으로 국제둔황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전산화된 각국에 있는 자료들을 서로 공유하며 오늘날까지 국제학술대회를 지속하고 있다. 한 곳의 지명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아 ‘둔황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 것은 이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아마 여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그의 공과는 차치하고 스타인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스타인이 수집한 불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석가모니의 〈수하설법도〉(크기: 가로 101.7, 세로 139㎝, 사진 2)를 꼽을 수 있다. 중앙에 화려한 꽃과 보석으로 장식된 보개 아래 붉은색 가사를 걸친 석가모니를 두고, 살집이 많아 통통하게 그려진 네 분의 보살(사진 3)과 여섯 명의 제자가 에워싸서 설법을 듣고 있는 구도이다. 맨 아랫단에는 좌우에 공양하는 남녀 한 명씩을 표현하였는데 아쉽게도 남자는 박락되어 모자 부분만 보인다. 오른쪽 여자 공양인은 붉은 입술이 돋보이는 앳된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불화는 스타인이 수집한 불화 중 가장 이른 시기인 8세기경 당나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한다. 당나라 후반 훼불과 전란으로 인해 수많은 당나라의 사원들이 소실되어서 당나라 불화가 드문 상황에 비록 둔황이라는 지방 양식이지만 당시의 불화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 

(사진 4)  스타인이 장경동에서 수집한 '보은경변상도' 9세기
(사진 4) 스타인이 장경동에서 수집한 '보은경변상도' 9세기

9세기경에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보은경변상도〉(크기: 가로 121.6, 세로 168㎝, 사진 4)는 중앙을 삼단으로 구성해 맨 위에 석가모니 삼존, 중앙에는 보살과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와 긴 끈을 들고 춤을 추는 무희(사진 5)를, 하단에는 보배로운 연못에 비로자나불과 좌우에 보살과 승려를 한 명씩 표현하였다. 그림의 좌우에는 전생담을, 하단에는 좌우로 공양하는 남녀를 묘사했는데, 여인들의 머리 모습이 특이하다.
스타인 수장품 중 종이에 그려진 불화 중에는〈지장시왕도〉도 여러 점 포함되었다. 그 중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지장시왕도〉(크기: 가로 495, 세로 28㎝, 사진 6)는 일칠일부터 칠칠일인 49일까지, 100일, 1년, 3년에 걸쳐 죽은 사람이 열 명의 왕을 만나는 과정을 그림과 함께 글로 내용을 적은 그림이다. 과장되고 세련되지 못 하지만 전하려는 내용을 간략한 그림을 통해 분명히 전하고 있다. 49일째 되는 날은 지옥의 시왕 중 일곱 번째인 태산대왕이 죽은 사람이 태어날 곳을 정해주는데, 이것과 관련해서 죽은 사람이 태어날 곳을 잘 지정받도록 49재를 지내 주어야 한다는 불교 풍습이 나왔다. 지옥의 시왕은 도교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인도에서부터 있었던 내용이 아니라 불교가 중국에 와서 도교와 결합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살아서 착한 일을 하고, 죽어서는 좋은 곳에 가길 바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었던 것 같다. 

(사진 5) 보은경변상도 중앙 장면, 음악과 춤추는 모습을 그려 천상의 풍요로움을 묘사하였다
(사진 5) 보은경변상도 중앙 장면, 음악과 춤추는 모습을 그려 천상의 풍요로움을 묘사하였다
(사진 6) 10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도' 부분으로 제7, 8, 9대왕의 모습이다
(사진 6) 10세기에 그려진 '지장시왕도' 부분으로 제7, 8, 9대왕의 모습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