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불교신문 31주년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원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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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불교신문 31주년 특별기획“제주 절오백”- 원만사
  • 이진영 기자
  • 승인 2020.09.29 13: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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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남쪽 자락이 숨긴 기도도량 - 원만사(圓滿寺)





제주는 오래전부터 깊은 신앙이 뿌리 내려져 있었다. 제주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이겨내면서 지혜롭게 삶을 가꿔갈 수 있는 힘은 신앙이 있어서 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는 마음은 곧 모든 생명에 대한 존엄성으로 이어지면서 제주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면서 살아왔다. 그리고 그러한 제주의 정신을 더욱 빛나게 만든 것이라면, 제주의 오래된 사찰들이었다. 그래서 절오백이 있게 되었고, 그 절오백은 지금도 제주사람들의 마음을 지탱하는 힘이 되고 있다. 제주불교신문이 31주년을 맞아 다시금 제주를 묵묵히 지탱해온 힘, 제주 절오백의 줄기를 따라가 보려 한다. / 편집자
원만사 전경
원만사 전경

서귀포시 도순리 맞은편, 한라산으로 뻗어 올라간 길로 들어서서 한참 차를 몰았다. 잠깐 한 눈 파는 사이, 원만사로 들어서는 길을 놓쳐 차를 다시 돌려 내려간다. 신중하게 표지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들어서니 포장된 시멘트 길이 가파르다. 제주에서 경험한 최고의 경사라 할만 했다. 굽이굽이 좁은 길을 타고 능선 위로 오르니, 서향으로 앉은 원만사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대웅전과 산신각, 그리고 요사채까지, 이 깊고 외진 곳에 구색을 갖추고 도란도란 모여 있었다. 햇빛이 들이치는 남쪽을 제외한 모든 방향이 능선과 그 위로 키 큰 삼나무들이 도열하듯 지켜서 가려주고 있어서 가람은 아늑했다. 

대웅전 앞에 선 석천 정법 스님
대웅전 앞에 선 석천 정법 스님

 

수행굴에 모셨었던 부처님
수행굴에 모셨었던 부처님

기별 없이 들렀는데도 올라오는 자동차 소리를 들으셨는지, 석천 정법 스님과 성연 전법사님이 마당으로 나와 계시다. 석가모니부처님을 주불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을 협시로 모신 대웅전은 고색이 창연했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생각 외로 넓고 가을의 양명한 햇살이 들이치고 있었다. 대웅전 뒤편 산신각에는 특이하게 관세음보살을 모셨는데, 여쭤보니 스님의 어머님이 모시던 관세음보살인데 따로 모실 원통전을 짓지 못해서 산신각으로 모셨단다.
원만사는 근대 제주불교의 모든 이력을 품고 있다. 제주 근대불교의 중창주인 안봉려관 스님과 방동화 스님, 그리고 제주불교의 비극인 4·3까지. 그리고 이런 내력을 설명해주는 것이 원만사의 수행굴과 샘물이다. 방동화 스님은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 당시 좌대장으로 참여했다가 6년간 옥고를 치른다. 이 후 1923년 1평 남짓한 수행굴에 의지하며 수행하던 곳에 세운 사찰이 원만사이다. 처음 스님이 숨어 지낼 때 물이 나지 않아 걱정을 했다고 한다. 당시 물은 나지 않고 습기만 남아서 촉촉이 젖어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제주불교의 중창주인 안봉려관 스님이 영실에서 물길을 찾았고, 스님이 앞에서 목탁을 ‘톡 톡 톡’ 치면서 걷고, 뒤에서 방동화 스님이 경을 읽으면서 원만사까지 내려왔다고 한다. 그 때 목탁소리를 따라 물이 ‘졸 졸 졸’ 따라 왔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샘물을 ‘훔쳐온 물’이라 부르기도 한다고 한다는 것이다. 

성연 전법사 님은 이 두 그루의 백일홍을 무척 아끼는 듯했다.
성연 전법사 님은 이 두 그루의 백일홍을 무척 아끼는 듯했다.

 

또한 근대 제주불교의 비극인 4·3 역시 외진 산중에 자리한 이곳은 더욱 더 비껴나가지 않았다. 성연 전법사님이 전해 들었다는 내용은, “당시 방동화 스님의 상좌인 양홍기 스님만이 원만사에서 기도를 하며 계셨어요. 당시 양홍기 스님의 나이는 21살이니, 어렸지요. 토벌대들이 원만사에 들이닥치자, 양홍기 스님에게 목장을 지키는 사람에게 안내를 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목장 사람은 양홍기 스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지요. 속았다고 느낀 토벌대들은 목장 인근 ‘냇바위’에서 스님을 총살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곳 원만사를 찾는다는 것은 제주의 근대사 혹은 제주불교의 근대사를 찾아보는 일일 것이다.

요사채 뒤편 능선의 수행굴
요사채 뒤편 능선의 수행굴

 

이후 원만사는 4·3 당시 잃어버린 마을처럼 폐허로 남게 된다. 역사의 혼란기가 잠잠해질 무렵 1962년 서시용 스님이 방동화 스님에게 원만사를 인수하여 2대 주지에 취임한다. 현 주지 정법 스님은 당시 13살에 들어왔다고 한다. 정법 스님은 1967년 서시용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하고 1969년 동산 스님을 법사로 비구계를 수지했다. 서시용 스님이 1972년 입적하지 정법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게 되었다. 스님은 1988년 현 진입로를 개설하고 1994년 10월 대웅전, 1995년 강당과 요사채를, 1997년 산신각을 증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샘물에도 원만사의 내력이 들어 있었다.
이 샘물에도 원만사의 내력이 들어 있었다.

9월 말 양명한 햇살이 내리쬐는 대웅전 앞마당에는 아름드리 백일홍이 자라고 있었다. 정말 보기 드물게 우람한 백일홍이었다. 성연 전법사님은 이 백일홍을 무척이나 자랑스럽게 여기는 듯했다. “이렇게 큰 백일홍은 전국적으로도 드물대요. 도에서도 나와서 조사를 해갔어요. 기자님도 내년 백일홍이 한창일 때 다시 오시라”고 했다. 그러면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내주며 눈 내린 원만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한참 설명했다. 해가 기울고 있어서, 오래 머물 수 없었기에 서둘러 차에 올랐다.
원만(圓滿), 요즘에야 일반적으로 성격이나 행동이 모나지 않고 두루 너그럽다는 뜻으로 쓰이는 말이지만, 불교에서도 공덕(功德)이 그득 차는 일이나 소원(所願)이 충족되는 일에도 이 말을 쓴다. 원만사라는 이름을 처음 지은 이의 뜻을 알 수는 없지만 아마 후자의 의미를 담으려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사찰 입구까지 배웅을 나오신 스님과 전법사님은 꼭 내년 백일홍 한창일 때 다시 와보시라 했지만, 올 겨울 눈 내리는 날 걸어서 다시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이곳 원만사에 눈이 쌓이고 휘영청 밝은 달이 뜬다면, 그야말로 원만(圓滿)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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