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황 막고굴을 중국 불교 미술의 보물창고라고 한다. 4세기부터 천 년 넘게 만들어진 490여 개의 석굴에 조성된 수많은 불상과 화려한 벽화, 그리고 장경동에서 발견된 누구의 손도 타지 않은 채 천 여 년 동안 숨겨져 있던 많은 유물과 문헌 자료들은 중국과 중국 주변 민족의 역사, 언어, 문화, 문학, 예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는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자료이다. 20세기 초 장경동이
발견된 후 둔황의 많은 유물들은 둔황 밖으로 유출되었고 그 유출된 유물과 문헌 자료를 교류, 연구하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둔황학이다. 한 지역의 유물과 문헌 자료를 연구하는 데 그 지역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너무 거창하다고 반문할 수 있지만 보기 힘든 10세기 이전의 자료라는 점, 중원지역에는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천 년 이전의 수많은 불상과 벽화에서 전하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전혀 지나치지 않다. 물론 둔황이 변방에 위치해 있다 보니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이라든지 낙양 등 중원 지역에 비해 양식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장안과 낙양에 있던 당나라와 그 이전의 사찰에 있던 불상과 벽화는 문헌으로나 확인할 수 있을 뿐 실제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 현실에서 그 시대의 생생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둔황 막고굴이 갖는 가치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둔황 막고굴이 있는 명사산은 굵은 사암 계통의 바위로 이루어졌다. 운강석굴이나 용문석굴처럼 정으로 조각해 불상을 만들 수 있는 재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무로 심을 만든 후 그 위를 짚 등으로 감은 다음 말총, 짚 등이 섞인 진흙을 발라 상을 만들고 마른 다음 그 위에 채색을 한 소조상을 제작해 봉안하였다. 불보살상 주변 벽과 천정에는 채색 그림을 그려 넣었는데 건조지역이어서인지 천 년 넘는 시간을 뛰어넘어 지금까지 잘 남아있어 굴 안에 들어가면 탄성이 절로 나온다.
현재 남아 있는 석굴의 구조는 중국식 표현으로 크게 선굴(禪窟), 중심탑주굴(中心塔柱窟), 전당굴(殿堂窟)로 나눌 수 있다. 선굴은 승방굴(선방굴)이라고도 하는데 인도의 비하라에 해당하는 승려의 생활공간이나 수행하는 굴을 가리킨다. 중심탑주굴은 인도 석굴의 예불당(차이티야)에 해당하는 것으로 굴 가운데 천정까지 연결된 탑을 둔 구조이다. 탑에 감을 파서 불상을 봉안한다. 마지막으로 전당굴은 말 그대로 굴 안쪽 벽에 예불할 불단을 마련한 구조로 둔황석굴에서 가장 오랜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만들어진 굴 형식이다. 이 전당굴은 입구에서 안쪽까지 연결되는 천정을 어떤 구조로 설계하느냐에 따라 여러 형태로 나뉘기도 한다. 아는 만큼 즐길 수 있다는 말처럼 이와 같은 막고굴의 굴 구조를 이해하고 보면 훨씬 흥미로운 순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선굴의 구조를 살펴보자. 대표적인 선방굴인 제285굴(사진 1)은 북쪽 벽의 공양자상 가운데에 명문(大代大魏大統四年歲次戊午八月中旬造)이 남아 있어 서위 대통 4년인 538년에 처음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천정과 벽의 벽화 내용이 매우 다양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받은 굴인데, 특히 천정부의 벽화에는 복희와 여와, 풍신과 우사, 뇌공과 전모, 사신, 도철 등 불교와 거리가 있는 중국 신화와 관련된 주제들이 그려져 있어 주목된다. 이런 그림이 그려진 이유로 이 굴을 조성하는데 후원한 과주자사 원영(元榮)이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도 후원하였기에 불교사원 속에 도교적인 요소가 반영된 것으로 본다. 굴은 6미터가 넘은 정방형이며 안쪽 중앙에 미륵상(사진 2)을 좌우의 작은 감에는 승려상을 봉안하였다. 굴 좌우 벽에는 각각 네 개의 작은 감을 만들었는데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공간이다. 중앙에는 사각형의 낮은 단을 만들어 굴 안에서 탑돌이처럼 돌 수 있게 했다. 예불을 드릴 불단과 수행하는 선방, 벽면에 그려진 불교적인 벽화와 천정의 도교의 이상세계를 통해 선방에서 수행하는 승려가 궁극적으로 얻으려는 것을 석굴에 구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심탑주굴은 한쪽이 긴 직사각형 형태가 많은데 그 중심 또는 조금 안쪽으로 치우친 부분에 사각기둥을 세운 구조이다. 이러한 형태는 인도의 말발굽 모양의 석굴 중심에 스투파(사리탑)을 안치하고 탑돌이 하는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각 벽에는 감실과 벽화로 장식되었다. 이런 구조를 한 이른 시기의 석굴로 북위 때 만들어진 제254굴(사진 3)을 들 수 있다. 너비 6.6미터, 깊이 9.5미터, 높이는 4.6미터의 큰 굴이다. 중심주 앞은 사람들이 모여 예불을 드릴 수 있는 공간이
며, 그 곳의 천정은 사람 인자, 즉 시옷자 형태로 설계되었다. 사람들은 중심주 앞에서 예불했거나 중심주를 돌면서 예불했을 것이다. 중심주 전면에 있는 큰 감에는 의자에 앉은 미륵불이 조성되었고, 다른 세 면에는 이층의 불감에 불상을 봉안하였다. 그 중 남벽 윗부분에는 다리를 꼬고 앉은 교각보살(사진 4)이 봉안되었는데, 둔황에서 만들어진 교각보살은 도솔천궁에 있는 미륵보살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둔황석굴에 가장 많은 형태의 굴인 전당굴의 이른 시기의 예로 천정 벽화로 유명한 서위 때 만들어진 제249굴(사진 5)을 들 수 있다. 굴 정벽에 큰 감을 만들고 미륵불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 벽에는 보살상을 안치하였다. 단이 다른 굴에 비해 낮은 게 특이하다. 양 벽에는 천불도를 그렸고, 천정에는 아수라, 서왕모와 동왕공, 뇌공과 전모, 풍신과 우사 및 수렵도 등이 그려졌는데 제285굴의 천정과 유사하다. 불교 석굴에 중국 신화 및 도교적인 요소를 표현한 것을 통해 제작 당시 중국의 종교 양상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데 의의가 있다.
현재 남아 있는 490여 개의 둔황 석굴을 다 볼 수는 없다. 극히 일부만 공개하기 때문이다. 특별 요금을 내면 추가로 더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공개되지 않은 것은 둔황 관련 다양한 문헌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둔황에 가게 된다면 먼저 공개되는 굴에 대한 정보를 알고 그 굴에 대해 공부를 하고 가자. 아는 만큼 보이고, 알면 사랑하게 된다.